세계로교회

세계로교회는 매주 목요일 오후 8시에 치유집회가 있습니다.   

치유와 은사

영성이야기

제목개인적이고 구체적이신 하나님2024-07-30 16:18
작성자 Level 10

개인적이고 구체적이신 하나님

어떤 부흥회에서 부흥강사가 회중을 위해서 방언 통역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회중에서 방언을 말하는 사람을 일어서게 하여 방언을 하도록 하고 그 방언을 통역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그런 집회 모습을 경험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집회에서 강사가 방언을 통역하는 내용을 보면 너무 막연하고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내용이라는 생각을 느낄 것입니다.

주로 “너를 사랑한다”라든가 “충성 봉사하라”라든가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라는 등의 상식적이고 막연한 내용입니다. 이런 말씀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이고 굳이 방언을 통해서 주어지지 않아도 잘 알고 있는 것들이지요. 막연하고 보편적인 내용을 방언 통역을 통해서까지 듣게 하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내용을 들으면 별로 감동을 받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내용들은 이미 성경에 기록해두고 있으며, 상식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내용은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상식적으로 깨닫지 못하는 수준의 내용들을 위해서 그리고 개별적이고 은밀한 내용을 다루기 위해서 일반적이지 않은 방법을 동원하는 것입니다.

방언을 통해서 주어지든지 예언의 말씀으로 주어지든지 그 내용은 개인적이고 구체적이어서 그 지시하심에 따라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말씀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특히 추상적이고 개인적인 것에 대해서는 우리는 입장에 따라서 전혀 다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주관적인 내용은 사람에 따라서 보는 관점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론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일을 하고 싶어하는 갈망이 있다고 합시다. 그 갈망이 자신의 욕심에서 비롯된 정욕적인 것인지,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소망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판단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 것처럼 자신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은 올바르고 정당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고 계속하게 되는 것이지요.

성경에서 보면,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행동은 제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값비싼 향유를 그렇게 낭비하는 일은 올바르지 못한 것으로 여겨졌지요. 그러나 주님은 그 행위를 칭찬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모릅니다. 올바르지 못한 판단을 하면서도 올바르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판단을 받아야 우리는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일들이 이처럼 주관적 판단에 매이게 되는 추상적인 내용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원론적이고 보편 타당한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적용이 간단하지 못합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입니다. 그래서 예언이 필요한 것이지요.

주님은 개별적이고 추상적인 내용에 대해서 우리가 주님의 시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게 하기 위해서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방언으로 주어지는 예언에 있어서 주로 이런 내용들을 다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밀하고 구체적입니다. 막연하고 보편 타당한 내용들은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방언이나 예언을 통해서 그런 말씀을 다시 하실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진정한 방언통역과 예언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실제로 방언을 통역하게 되면, 주님이 얼마나 세부적이고 사소한 일에 그토록 관심이 많은지 놀라게 됩니다.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도 못하고 넘겨버린 사소한 일에 대해서 주님은 잊지 않고 지적하시고 점검해주십니다. 그래서 우주를 창조하신 대주제 하나님이 이렇게 사소한 일에 관심을 가지시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로 보면 너무 좁쌀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세세하신 것을 느끼고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통해서 주님은 너무도 인간적이고 우리의 아버지시며, 형제이시며, 친구이시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도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도 대충 그리고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됩니다. 그렇게 되는 까닭을 저는 성경에 있다고 봅니다. 성경은 솔직히 말해서 우리 자신과 너무도 먼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이미 2000년전의 사람들이고 그 내용들이 너무도 추상적이고 객관적입니다. 그래서 그 내용이 자신의 것으로 절실하게 와 닿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이지요. 모든 말씀이 자신을 위해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기까지 어떤 사람은 일생이 걸릴 수도 있고, 어쨌든 많은 시간이 흘러야 말씀이 자신의 것으로 와닿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말씀은 여전히 일정한 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언으로 주어지는 말씀과 성령의 음성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바로 그 내용이고 자신을 중심에 두고 다루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너무도 실감이 나고 그런 말씀을 들으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감격이 절로 나옵니다. 주의 음성을 들으면 그 모든 말씀이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너무도 감격하고 정말로 주님이 나의 아버지고 나의 구주이심을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음성을 들으면 살아나리니 지금이 이 때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사는 시대는 주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는 감격의 시대라고 합니다. 막연하고 피상적인 내용의 말씀으로는 아무런 감격도 설레임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은밀하고 구체적이고 세밀한 내용의 말씀으로 위로를 받고, 격려를 받으며, 때로는 책망을 받는다고 해도 감사할 뿐이고 송구스러울 뿐이지요. 주님의 마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섣불리 행동한 자신의 경솔함이 너무도 미안하고 송구스러워 눈물이 나오고 그런 자신을 사랑해 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너무도 고마워 펑펑 눈물을 한없이 흘리면서도 가슴 한켠으로는 넘치는 기쁨을 또한 주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감격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구체적이고 세밀한 주의 음성을 들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방언을 통해서 들을 수 있는 내용들은 그런 구체적이고 세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막연하고 일반적인 내용은 주님은 다루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막연하고 일반적인 내용으로 통역하는 것일까요? 그 까닭은 통역을 하는 사람의 태도에 기인한다고 봅니다. 통역하는 사람이 평상시에 주님을 그저 막연하게 일반적인 관점으로만 대하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일반적인 교리와 기록된 보편적인 내용으로 만나는 그런 하나님으로 여긴 것이지요. 제사를 드리고 경배하고 두려워하고 범죄하면 징벌하시는 그런 통상적인 개념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며, 친구이시며, 형제이시다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친밀함이 어떠한 것인지를 실제로 보여주심으로써 이제까지 이스라엘이 알고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시각을 통째로 바꾸어 버린 것이지요. 아바 아버지라는 개념은 이스라엘에 있어서 전혀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이런 하나님은 여전히 생소한 분들이 있습니다. 기록된 성경의 문자 속에서만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지않습니까? 주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이 성경에만 있는줄 알고 주야로 상고하고 있지만 그 찾고 있는 분이 지금 그들 앞에 실제로 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때 그들은 격분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에서도 이런 행동을 하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기록된 성경에서만 하나님을 만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우리는 영으로 주님을 만나고 그 주님을 성경에서 확인합니다. 뵈레아 사람들은 신사적이어서 바울에게서 들은 말씀이 올바른지를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면서 살폈듯이 우리는 영으로 말씀하시는 그 분의 말씀을 날마다 성경을 통해서 상고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판단을 존중히 여기고 그 판단에 순종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술이 부족하거나 경험이 적은 경우입니다. 음성을 듣는 일은 많은 경험을 필요로 합니다. 특히 세밀한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런 훈련을 거쳐 온전해져야만 구체적이고 세밀한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되지요.

하나님은 우리의 사소한 일에도 관심을 많이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우리는 배우고 인식하여야 합니다.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님을 진정 아버지로 인식하는 신인식(divine knowledge)이 요구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막연하게 알던 것에서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알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알아가는 것은 오로지 주의 음성을 날마다 들음으로써 가능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우리가 도달해야 할 최고의 목표는 온전한 것을 받아들여 얼굴로 얼굴을 대하는 것처럼 그렇게 주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이 그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알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놓고 있습니다.

방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밀한 곳까지 알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예언의 영을 통해서 하나님의 깊은 곳에 이르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우리의 세부적이고 개인적이고 은밀하고 구체적인 내용들을 직접 말씀하시는 그런 세상이 열려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상담자이십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상담자 즉 카운셀러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마음 놓고 상의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는 그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할 뿐입니다. 그 길은 열려있는 길이고 누구나 찾으면 만날 수 있는 개방된 길입니다. 이런 길을 먼저 가고 있는 훌륭한 지도자들이 여러분 곁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분들에게서 배우고 익혀 그 길로 가야합니다. 주님은 그 길을 우리에게 소개시키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그 길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길이 여러 가지 방해로 인해서 거의 2000년 동안 우리에게 가리어졌었고 지금도 무지한 지도자들 때문에 그 길이 쉽게 우리에게 열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원수가 우리 가족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한다면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주님은 막연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아주 세밀하고 구체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창조하신 이 우주를 보아 알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세밀하게 말씀하셔서 지은 성전과 방주와 제사의 규례 등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주님이 여러분의 방언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세하게 말씀하십니다. 꿈과 환상을 통해서, 예언을 통해서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장차나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제자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하신 그 분은 우리에게 지금 역시 자세하게 말씀하시는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신인식이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이십시오. 막연한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의 친 아버지보다 더 자상하시고 세밀하신 아버지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일에 일일이 조언하시고 이끄시는 그런 아버지를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머리 속에만 있는 인식으로서의 아버지이거나 관념 속에 있는 막연한 아버지로서는 안됩니다. 자신이 필요할 때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는 그런 하나님은 우상일 뿐입니다.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하는 그런 하나님은 책속에 있는 동화일 뿐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시고 말씀하시는 분이시며 책속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댓글
자동등록방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