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선택을 합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신인식”(devine knowledge)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데는 나름대로 독특한 방법들이 있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것은 개인적인 사항이기 때문에 사람들마다 각각 독특할 수 있습니다. 나의 신인식 방법과 다르다고 해서 이상하게 여길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다양한 신인식 방법들이 있지만 그런 것들을 크게 나누어 보면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성적 신인식’과 ‘감성적 신인식’과 이 두 가지를 절충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법은 주로 학구적인 사람들이 선택하는 방법이며, 오늘날 대부분의 배운 사람들이 선호하는 방법입니다. 감성적인 방법은 주로 감성이 풍부한 사람들이 선택하는 방법이며, 다소 학문적 배경이 약한 사람들이나 여성들이 많이 선택하는 방법입니다. 이 두 가지 방법은 각각 장단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를 적당하게 혼합하는 방식을 선택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으로 알아갈 것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가든지, 감성적으로 알아가든지 상관없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은 경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5: 12~14에 “여러분은 벌써 오래전에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할 터인데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원리를 남에게 다시 배워야 할 처지입니다.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아직도 젖을 먹어야 할 형편입니다. 젖을 먹어야 할 사람은 아직 어린아이이니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숙해지면 단단한 음식을 먹게 됩니다. 성숙한 사람은 훈련을 받아서 좋고 나쁜 것을 분간하는 세련된 지각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단단한 음식과 젖이라는 두 가지 상징이 등장합니다. 단단한 음식과 대조되는 젖은 부드럽고 먹기 좋은 음식 즉 자신의 수고가 거의 없이 섭취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신인식 방법인 이성과 감성을 통해서 얻어지는 지식은 그 자체로는 젖입니다. 성경공부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든지 기도를 통해서 신비한 영적 경험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든지 이 모든 것은 그 자체로는 단단한 음식이 되지 못합니다. 갈라디아서 3:25에는 ‘몽학선생’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이 말의 헬라어는 ‘파이다고고스’인데 이 말이 뜻하는 바는 ‘가정교사’ ‘길 안내인’ 등입니다. 고대사회에서 여유가 있는 가정에서는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덕망있는 스승을 모셔서 아이들을 가르치게 했습니다. 물론 일반인들은 학교조차 갈 수 없었던 그런 사회였으므로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지요.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이제 선생의 그늘 아래에서 배울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배워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우리의 신앙생활은 홀로 가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집단적으로 무리를 형성하려고 하는 유혹에 빠집니다. 흩어지는 교회가 아니라 뭉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목회자의 이기심이 강하게 영향을 주었다고 봅니다. 교회 안에만 머무르기를 바라는 것이 목회자의 이기심입니다. 모여있어야 안전하고 목회자의 시야를 벗어나지 않아야 안심이 됩니다. 목회자끼리 경쟁이 극심해지는 요즈음은 더욱 그렇습니다. 목회자가 원하는 바는 성도들이 여전히 어린 아이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심리학 용어에 “어른 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겉모습은 어른인데도 불구하고 행동은 여전히 아동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모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스스로 어떤 일도 하지 못하는 심각한 발달 장애를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이런 ‘성인 아이 증후군’에 속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많지만 그 지식은 교회 안에서만 적용될 뿐 사회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주일 성수’ ‘십일조’ ‘구역봉사’ ‘기관 봉사’ ‘전도’ ‘성경공부참석’ ‘심방참석’ 등의 일은 아주 잘합니다. 기도도 많이 하고 각종 봉사도 기쁜 마음으로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정말로 나무랄데 없는 훌륭한 성도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그 말씀을 실천하는 일에는 그렇지를 못합니다. 말씀을 믿음으로 행동에 옮기는 일에는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속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갑니다. 구별된 삶은 교회 안에서만 보여질 뿐 세상에서는 여전히 세상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 모습으로 삽니다.
감성적인 성향의 사람들도 역시 그렇습니다. 누구보다도 더 많이 기도하고 영적 경험도 풍성하고 능력도 나타납니다. 사람들로부터 신령한 사람이라는 말도 듣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여전히 교회 중심이지 세상 중심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세상과는 담을 쌓아 구별된 삶을 살려고 합니다. 세속적인 사람들과 접촉하기를 꺼립니다. 세속적인 사람들과 접촉하면 영적으로 손상을 입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들과 접촉하려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배타적입니다. 교회 안에만 머무르려는 행동이나, 영적 세계에만 머무르려는 생각 모두는 역시 젖에 속합니다.
히브리서는 성숙한 사람은 훈련을 받아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간하는 세련된 지각을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성숙한 사람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요? 단단한 음식을 먹는 그런 사람을 말합니다. 이 단단한 음식을 통해서 영양을 섭취하는 일이 훈련을 받는 일입니다. 이 훈련은 제도적으로 만든 인위적인 훈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말씀을 경험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 감당하게 하는 거친 일들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닥치는 모든 일들이 그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현실적인 삶에서 우리의 생각과 세상의 가르침을 따라 행동하고 처신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동하는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삶에 적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말씀대로 적용한다면 망할 것 같은 위험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일을 거부하게 되고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요령을 쫓아갑니다. 이런 삶은 필연적으로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듭니다. 성(聖)과 속(俗)이라는 이중 구조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말씀은 교회 안에서 배우고 듣는 것으로 만족하고 행위는 세상학문에서 배운 방법과 요령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이런 행위에 대해서 누구도 탓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런 요령있는 삶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성공하는 지름길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히브리서에서 언급하는 그런 방식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 환영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을 당하는 것입니다.
단단한 음식을 먹는 삶을 산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공이란 세속적 안목에서 결정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시각이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방식의 성공이 성공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성공의 판단 기준은 철저히 세속적 기준에 의해서 정의 되기 때문이지요. 성공만을 절대적 가치로 생각하는 요즘 세대에 있어서 단단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얻은 일체의 신의식은 반드시 우리의 현실적 삶에서 받아들여지고 그렇게 살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온전한 사람 즉 성숙한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에 적용하는 일은 무척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여기에는 담대함이 있어야 하고 두려움이 없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이 처음부터 자동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적고 사소한 일부터 삶에 적용하는 단계적인 훈련을 통해서 우리는 강하고 굳센 믿음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성경공부를 통해서 얻은 지식이든지, 기도를 통해서 영적 경험으로 얻은 지식이든지 상관없이 이 모든 지식은 반드시 현실이라는 도가니에서 단련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바로 우리를 연단하는 주님의 풀무입니다. 이 풀무에서 정금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할 것인지, 세속적 방법을 선택할 것인지 우리는 항상 그 선택을 요구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면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지만 세속적 방법을 선택하면 당신은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비록 그 선택으로 인해서 자신이 아끼는 것을 잃는다해도, 세상의 눈으로 보이는 그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해도 우리는 하나님에게 속해야 합니다. 우리의 선택은 항상 하나님 그분이어야 하고 그분을 선택하는 그것 자체로 우리는 만족하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바로 당신이며, 당신이 하나님을 선택하는 그 모습을 보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