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이 약한 사람
신체가 건강하고 힘이 센 사람이 있듯이 영이 강하고 담대한 사람이 있고, 그와 반대로 병들고 유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경험이라는 삼 요소에 의해서 강건해지고
힘이 생기게 됩니다. 이 세 가지 요소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영은 기형이 되고 한 쪽으로 치우쳐 힘을 내지 못합니다. 영이 강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영이 지금 어느 상태에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하고 어느 부분으로 치우쳐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영이 약한 사람은 무기력하고 외부의 자극에 반응을 하지 못합니다. 무기력하다는 말은 영적인 일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전히 세속적인 일에만 흥미를 느끼고 영적인 일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도 않고 흥미도 없습니다. 교회에 출석은 하지만 마지못해서 가거나 할 수 없이 끌려가는 수준입니다. 예배 시간보다도 교제의 시간이 더 즐겁고 세속적인 이야기만 하며 세상사는 것처럼 행동하며 교회 생활도 세상살이의 연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 이야기만 하면 신바람이 나다가도 영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금방 풀이 죽고 시큰둥합니다. 영이 약한 사람은 영적 감흥을 제대로 느끼지 못합니다. 부흥회에 가도 낯설기만 하고 그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합니다. 그 자리가 거북스러워 견디지 못합니다. 기도는 물론 전혀 할 줄도 모르고 할 필요도 못 느낍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은 영이 아사직전입니다. 이런 사람은 스스로 영을 키우고 강하게 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에 주변의 도움이 절대로 필요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영이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말씀을 먹이고 기도에 합류시켜 영에 힘을 불어넣어주어야 합니다. 스스로는 일어설 힘이 전혀 없는 무기력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영이 약한 사람은 방향감이 없습니다. 정신이 흐리멍텅하며 자신이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위치 파악이 안 되는 것처럼 이런 사람은 지금 자신이 가고 있는 방향이 어디인지를 모릅니다. 목표와 방향이 없기 때문에 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무엇 때문에 교회에 출석하고 봉사하는지를 모릅니다. 무엇 때문에 말씀을 들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방향을 모르기 때문에 위치 파악이 되지 않고 주변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이리 저리 방황하며 어찌 할 바를 모르지요. 기도는 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무작정 닥치는 대로 이렇게 해보고 저렇게 해봅니다. 그리고는 쉽게 포기합니다. 영이 약한 사람은 감정을 이기지 못합니다. 속사람이 겉사람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겉사람의 요구에 끌려 다닙니다. 감정적인 사람은 감정에 이끌리고 이지적인 사람은 논리에 끌려 다닙니다. 그러므로 한 쪽에 치우쳐서 생활하게 됩니다. 감성과 이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자연인의 상태로 더욱 기울어집니다. 감정적인 사람은 즉흥적인 행동을 하게 되고, 이지적인 사람은 논리적으로 따지게 됩니다. 감정적인 사람은 대부분이 여성이고, 이지적인 사람은 남성들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감정적인 사람이 무언가 부족하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취급을 받지만 실상은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문제입니다. 교회도 주도권이 남성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게다가 영이 약한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이지적이고 논리적인 것이 올바른 것처럼 오해되고 있습니다. 말씀과 능력이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한 쪽으로만 치우쳐 있기가 쉽습니다. 이 둘이 균형을 이루는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어려운 과정을 거쳐 바람직한 영적 균형을 이루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이 약하면 균형을 이루기가 쉽지 않습니다. 약한 영은 모험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모험을 필요로 합니다. 학문적인 과정을 통해서 배우는 이론적이고 교리적인 지식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성령을 통해서 배우는 지식은 많은 도전을 필요로 하고 위험하게 보이는 모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학교를 광야의 학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영이 약하면 이 과정을 소화할 수 없습니다. 영이 약한 사람은 광야의 시험을 두려워합니다. 영이 약한 사람은 새로운 것을 거부합니다. 안전하고 일상적인 것을 좋아하고 새롭고 낯선 것은 싫어합니다. 항상 똑 같은 절차와 방식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일정한 수준과 경계를 만들어 놓고 그 범위를 넘어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태도는 본능에 기인한 것입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본능적으로 영역에 대한 집착이 있습니다. 늘 다니던 길로만 다니고 자신의 영역 안에서만 활동합니다. 생명의 위험이 닥쳐도 영역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영이 약한 사람은 안전하고 예측이 가능한 길로만 갑니다. 그래서 성령의 변화와 다양한 역사를 받아들일 여지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기적을 만드는 삶은 더더욱 꿈도 꾸지 못합니다. 제사장들이 율법에 기록된 대로 하듯이 틀에 박힌 종교 행위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영이 약한 사람은 기도가 형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늘 같은 수준의 기도와 같은 방법의 기도만 합니다. 기도 역시 틀에 박힌 교과서적인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이 인도하는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영이 약하기 때문에 성령의 충격을 받아들일 만한 자신감이 없습니다. 기도하다가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게 되면 두려워서 기도를 끝내고 더 이상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상한 현상이 나타날 것 같으면 마귀라고 생각하고 거부합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틀에서 벗어나면 모두 위험하고 마귀의 침해라고 여깁니다. 자신의 방식으로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면 모두 거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적 응답이라는 것을 별로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가며,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란 도무지 이해되지도 않고 이해할 필요도 느끼지 못합니다. 영이 약한 사람은 삶에서 영적 경험이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일이란 성경을 읽고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그 이상은 오히려 신비주의로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의지로 판단하고 세상적 안목으로 결정하려고 합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상식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습니다. 합당한 논리도 있고 말씀에 근거하기도 하므로 이상하게 여길 것이 전혀 없습니다. 이런 결정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들이 삶은 봉사의 수준은 될지언정 기적을 만들고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성령의 열매는 맺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에 맞추어 희생을 드리고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런 행위는 누구도 나무랄 수 없는 완벽한 율법준수였고 하나님이 정하신 법에 충실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도 흠을 잡을 수 없는 완전한 것이었지만 이런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은 신물이 난다고 표현합니다. 이들이 드리는 제사는 짐승의 목을 비트는 행위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사술을 행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들의 제사를 전혀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기록된 말씀에만 따라서 행동하였기 때문입니다. 기록된 말씀에 비추어서는 전혀 이상이 없지만 그런 행위를 하는 배경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영이 약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이 성령으로 인해서 단련되고 훈련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영이 강건해야 하는 것은 필수입니다.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지 않고서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수준에 이르기까지 불가불 지도자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영이 강건해지는 법을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영이 강건해지는 세 가지 요소를 우리가 어떻게 균형 있게 행하는가 하는 문제가 영성을 개발하는 과제인 것입니다. 이 과정은 개인적 성향과 특성으로 인해서 일률적으로 공식화할 수 없다는 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성훈련은 개별적이고 개인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도 12명을 한계로 설정하고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실제로 한 사람이 다룰 수 있는 제자는 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다양한 특성을 지닌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가르쳐야 하는 영성훈련은 말처럼 쉽지 않음을 저는 20여년의 경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수십명 수백명을 상대로 하는 제자훈련이나 속사람치유(내적치유)는 분명히 바람직하지 못한 문제를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교리교육이나 이론 교육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법을 배우는 데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육방식은 피라밑 방식입니다. 제자가 제자를 길러내는 것이지요. 그 한계가 12명 이하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접촉을 통해서 스승이 지닌 능력과 지식을 제자에게 전하고 제자는 그 능력을 받아 더욱 강하게 키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엘리사가 엘리야의 능력을 받아 더 많은 사역을 했던 모델입니다. 인간적 교제 속에서 경험하면서 배우는 것이 하나님의 제자 세우기 방식입니다. 제자 훈련이라는 말은 온전한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저는 이 말보다는 제자 만들기 또는 제자 세우기 라는 말이 적당하다고 봅니다. 제자를 만들고 세우는 일은 함께 인격을 나누고 교제하는 친밀함 속에서 가능합니다. 그러려면 절대로 소수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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