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와 권세의 차이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신령한 은사와는 달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와 비슷한 형태의 능력이 주어집니다. 그것은 은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에 의해서 우리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순간에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권세는 누구나 차별이 없이 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권세를 사용하여 화려한 은사를 받은 사람과 비슷하게 능력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권세는 여러 모에서 은사와 다른 조건과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목적도 다릅니다. 은사와 권세는 아무런 조건이 없이 기본적으로 선물로 주신 것이며, 우리가 거듭날 때 임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은사는 예외적으로 거듭난 후에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인식하였을 때 임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성령께서 나누어주시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자녀 된 권세로서의 능력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것이 원칙이며, 이것은 예수 안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주로 고백하면 예수와 한 몸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로 인해서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획득하게 되고 그 결과 예수와 동일한 자녀로서의 권세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자녀로서 우리 가운데 육신의 삶을 산 것처럼 우리 역시 아들로서 육신의 삶을 살면서 그에 필요한 모든 권세를 아들로부터 받게 되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장자권(the Sonship)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마치 은사로서 주어진 능력과 같은 것입니다. 다만 조건과 목적이 다를 뿐 내용은 동일한 것입니다.
9가지 신령한 은사는 한 사람이 모두 가질 수 없습니다. 아주 특별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모든 사람에게 성령은 골고루 한두 가지 씩 나누어주시는 것입니다. 은사는 교회의 덕을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권세는 자신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 기능을 ‘함양하는 기능’(edification)이라고 말합니다. 이 권세가 있음으로써 세상 사람들과 구별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애를 써도 이 능력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이런 권세가 주어짐으로써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인하게 되며, 세상도 자신들과 다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믿음을 비롯해서 ‘방언 말하기’ ‘영을 분별하기’ ‘귀신 쫓기’ ‘병을 치유하기’ ‘믿음’ ‘예언을 말하기’ ‘기적을 행하기’ 등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 스스로 자부심을 얻게 하기 위해서 아주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것만 해도 권세로서의 방언은 아주 단조로운 단어를 반복하는 수준에 그칩니다. 그래서 지루하고 별로 쓸모가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처음 방언이 나타나면 신기하여 자신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하게 되어 감격합니다. 그래서 초기 일부 신학자들은 방언은 구원의 징표라고 단정했었습니다. 자녀의 권세로서 주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서 장자권의 인식이 한층 강화되는 것입니다.
예언을 말하는 것 역시 자녀가 되어 그 징표로서 주어진 것은 주로 예언의 영이 임해서 행하는 예언입니다. 자녀가 되면 우리에게는 돕는 천사가 주어집니다. 이 천사는 다양한 기능을 가진 존재로서 그 가운데 예언을 하는 천사가 우리에게 임해서 예언을 말하게 돕습니다. 천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은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종에게는 천사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아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지요. 이 천사는 대언하는 영인데 이들이 우리 몸을 사용해서 예언을 말하게 합니다. 이 예언은 공동체 안에서 분별을 통해서 확증을 얻어야 합니다. 대언의 영 역시 우리의 존재 의식을 함양하기 위한 목적이 우선입니다. 그러나 예언의 은사는 예언자로 세워지기 위해서 우리 몸에 부어지는 예언의 기능에 의해서 성령께서 직접 행하시는 것입니다. 대언의 영인 천사의 도움으로 행하는 예언과 성령께서 직접 행하시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나타납니다.
이것의 차이는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만큼 그 성숙함에도 다르며, 영역에서도 다르며, 효과도 다릅니다. 은사로서의 방언은 모든 능력을 행하기 위한 촉매의 역할을 합니다. 방언의 은사가 있어야 다른 은사를 제대로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신유의 은사가 환자에게 임하게 하기 위한 촉매제로서 방언의 은사가 필요합니다. 이때의 방언은 우리가 늘 기도할 때 하는 그런 방언이 아닙니다. 귀신을 쫓을 때 역시 다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각종 방언은 이 경우에 해당하기도 합니다. 은사로서 방언은 다른 은사를 불일 듯 하게 하며, 그 은사가 작용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방언은 영의 음성이며, 이 영의 음성은 영을 자극해서 활발하게 하는 일을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하는 것이 은사로서의 방언입니다.
은사로서의 믿음은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믿음을 강화시키는 작용을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은 그리스도를 주로 인식하는 믿음이며, 이는 신분을 강화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은사로서의 믿음은 다른 사람들을 강화시키고 주의 일에 담대함을 얻을 수 있도록 돕습니다. 믿음의 은사가 없으면 예언도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언이란 원래 모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믿음을 오로지 은사로서 주어진 것일 때 강력해집니다. 믿음의 은사는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믿음이 없어서 어떤 일을 수행할 수 없을 경우, 특히 자신에게 주어진 생활의 은사를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이 부족할 때 은사로서의 믿음은 그 역할을 충분히 해 낼 수 있는 능력을 덧입게 만듭니다.
은사로 주어진 능력들은 그 일을 행할 때 자신의 내면에서 돌발적으로 솟구쳐 나옵니다. 은사는 자신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그 기능이 솟구쳐 나오는 것입니다. 상황에 맞추어서 강력하게 그리고 충동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즉흥성이 강합니다. 성령은 그 본성 가운데 하나가 즉흥성입니다. 우리의 기대와는 상관없이 돌발적으로 나타나며, 우리의 절제와 통제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은사는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고도의 숙련된 행동 양식이 필요하며 항상 긴장하여 성령의 흐름과 기름부음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를 기대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이 자신의 통제와 절제를 통해서 교회에 유익이 되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미 앞의 글에서 은사는 우리의 절제를 전제로 부어지는 것임을 설명했는데, 성숙과 미숙은 이것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상황에 맞추어 적절하게 통제할 것인가가 하는 많은 경험의 차이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권세로서의 능력은 우리의 통제가 거의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이며, 아주 제한적이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거의 없습니다. 이는 그 출처가 다르기 때문이지요. 예수의 영으로 인해서 주어진 자녀로서의 권세는 일정한 수준을 정해서 주어지기 때문에 즉흥적이지도 않고 상황에 따라서 가변적이지도 않습니다. 방언만 해도 늘 같은 수준의 방언을 하기 때문에 지루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은사로서의 방언은 상황에 따라서 아주 생소하고 색다를 수 있습니다. 방언이 갑자기 전혀 다른 단어와 톤으로 바뀌면서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언을 담은 방언 역시 예언의 은사로서 행하는 예언인데 이 경우에는 통역이 따라오게 됩니다. 한마디 방언을 말하고 바로 우리말로 통역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유의 은사를 행할 때는 다양한 부대 기능들이 수반됩니다. 지식의 말씀을 비롯해서 지혜의 말씀, 방언, 영 분별 등과 같은 다양한 은사들이 동원되어 신유를 더 정확하게 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러나 권세로 병을 고치는 경우에는 따라오는 부가적 기능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기도를 믿음으로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효과는 마찬가지여서 병이 고침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는 상황적이어서 그 때 뿐이며 항상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권세로서의 능력은 자신의 정체성을 돕고 자녀 된 신분을 강화하는 목적이기 때문에 병을 치유함으로써 하나님 안에서의 자신에 대한 신뢰가 더 강해집니다. 물론 고침을 받은 사람도 유익을 얻지만 그 기본적인 목적은 자신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은 항상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간헐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집단적으로 발생하기도 합니다. 신유의 은사가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환자를 위해서 기도할 때 그 병이 고침을 받습니다. 이 경우 은사로 고쳐진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믿음으로 치유가 발생한 것이며, 모든 회중이 자녀 되었음을 기뻐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권세가 있습니다. 이 권세로 인해서 우리의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시련과 어려움을 만났을 경우 우리는 자주 우리의 장자권을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 믿음 안에 굳게 설 수 있도록 각 사람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 권세는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즉 세상과 차별을 가져올 수 있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불려나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자녀 된 권세입니다. 이 권세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상황에 이르면 언제든지 나타나는 능력과는 다릅니다. 그 사람의 어떤 상황이나 성숙과는 달리 오로지 타인의 문제를 해결하여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백성을 돌보시고 계심을 나타내는 증거로서 주어진 은사와는 분명히 차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세는 우리의 정체성이 약화되었을 경우에 이적적인 수단을 드러냄으로써 다시금 그 신분에 대한 확증을 가져다주시는 주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