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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이야기

제목가난했던 때를 기억하십시오2024-07-27 22:52
작성자 Level 10

가난했던 때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나안으로 들여보내기 직전에 그들에게 당부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신들도 이집트에서 가난하고 종 된 삶을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종으로서의 삶은 자유하지 못한 삶입니다. 가난한 삶도 역시 자유하지 못한 삶과 같습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경험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그 사실을 잊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그러므로 주위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도움을 주기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불과 반세기 전에는 가난한 백성들이었습니다. 국민 대부분이 흰 쌀밥을 마음껏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유년시절에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풀뿌리와 밀껍질로 끼니를 겨우 때우던 기억이 있습니다. 잡곡이 가득한 속에 흰 쌀알이 눈에도 잘 띄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먹고 살았습니다. 길은 비포장이어서 비만 오면 질퍽거렸고 지금처럼 얼었던 땅이 풀리는 봄철에는 매일 장화를 신고 다녀야 했습니다. 이것이 불과 30~40년전의 일입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늘 허기진 배를 안고 살았고 아이들의 머리에는 버짐이라는 영양실조에서 오는 피부병을 달고 다녔습니다. 이런 극도의 가난과 궁핍으로 인해서 하루 먹고 사는 일이 가장 큰 문제였던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 세대가 아직도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아도 할 수 없고 가지고 싶은 것이 있어도 가질 수 없는 부자유함이 가난입니다. 이런 가난한 시절을 경험한 저의 나이 이상의 세대가 아직도 이 땅에 살고 있는데 우리는 그 가난한 시절을 잊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장년들에게 당부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광야의 쓰라림을 모르는 세대에게 이 사실을 가르쳐서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당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들의 식탁에 이스트를 넣지 않은 거친 빵을 올려놓습니다. 이 빵은 그들이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때와 광야의 거친 시절을 지날 때 먹었던 고통의 빵이며, 가난의 상징으로써, 그들 식탁에 올려놓고 식사할 때마다 배고픔이 얼마나 자유를 속박하는 지를 잊지 않게 하고 근검하고 절약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오늘날에는 검은 빵을 식탁에 올려놓는데 이것 역시 그들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살 때 먹었던 쓰라림의 빵입니다.

가난한 시절을 통과한 우리 세대가 그런 가난함을 모르는 자녀 세대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낭비와 무절제로 인해서 자원이 고갈되며, 비만으로 인해서 또 다른 사치함을 불러옵니다. 젊은 세대는 살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무절제한 풍요함은 축복이 아니라 방종이며, 저주입니다.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지구촌의 3분의 2는 절대 빈곤 즉 하루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심각한 가난 속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30억이 넘는 지구촌 식구들이 과거에 우리들처럼 처참한 삶을 살고 있으며, 궁핍으로 인해서 자유가 없는 속박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와 러시아 등의 나라는 절대 빈곤으로 인해서 자유함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5~60년대의 삶보다 더 처참한 가난과 역경 속에서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는 복음을 들고 가야하며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섬김과 나눔입니다. 가난을 경험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의 처지를 알 수 있으며, 그 고통도 압니다. 우리는 이미 반세기 전까지 이런 가난함이 일상이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때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내기 위해서 얼마나 몸부림을 쳤었는지를 요즘 젊은 세대들은 잘 모를 것입니다. 지금 지구촌의 3분의 2가 이런 실정에 놓여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에게 맡겨진 구원의 대상인 것입니다.

가난을 경험하고 그 가난을 극복한 우리가 이제 그들의 가난함 속으로 들어가 나누어주어야 하는 시대에 사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이 풍요의 땅 가나안에서 기억해야 했던 것이 가난한 시절의 고통이듯이 우리도 역시 풍요한 시대에 살면서 기억해야 할 것이 가난하던 시절의 어려움입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하는 까닭은 지금 우리 곁에 그런 가난으로 인해서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 곁에 있는 것은 우리를 시험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절대적 표현 수단이 된다는 점입니다.

평신도 또는 평범한 일반인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는 영어 layman의 lay는 헬라어 레이포(leipw)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이 말은 ‘부족하다’ ‘모자라다’‘물건이 소모되다’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이런 바탕에서 생긴 ‘layman’은 ‘부족한 사람’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깔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전문가가 아닌 비전문가 집단을 상징하는 말로 의미가 확장되어 쓰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범한 일반인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같다는 개념으로 보는 것이 서구적 사고인 것입니다.

우리의 정체성 (identity)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해서 우리 곁에 가난한 사람들을 두고 계시는 것이지요. 우리 역시 가난한 삶 속에서 나왔기 때문이며, 언제 다시 가난해질 수 있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중산층으로 자유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지금 하층국민으로 내려와 어려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풍요한 삶은 항상 보장되는 삶이 아닙니다. 누구나 언제든지 다시 가난해질 수 있고 어려움을 만날 수 있는 가변적인 삶입니다.

우리 민족의 반쪽인 북한은 절대 빈곤국가이며, 아프리카의 소말리야 보다 국민소득이 더 낮은 최빈국입니다. 매년 수 십만명이 굶어서 죽습니다. 이들을 향해서 우리의 풍요함이 흘러 들어가야 합니다. 섬김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우리에게 풍요함을 주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가난하지 않은 시절에 가난을 생각해야 합니다. 건강할 때 건강을 생각해야 하듯이 말입니다. 가난한 삶에 대한 의식이 없으면 우리는 그 가난 속으로 너무도 빨리 밀려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복음을 들고 가는 곳마다 찌든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우리의 이웃을 만나게 됩니다. 수많은 선교사들이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보면서 이들에게 주어야 할 것이 너무나 많고 베풀어야 할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님을 절실하게 느낀다고 합니다. 가진 것을 나눌 때 그들에게 복음이 능력으로 스며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은 우리 곁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소돔을 징벌한 까닭 가운데 하나가 가난한 이웃을 멸시하고 그들과 나누지 못한 잘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풍요함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가난한 이웃에게 우리의 가진 것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부하신 위대한 사명(the Grate Commission)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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