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음성을 듣기 원하는 이들에게
누구든지 성령의 음성을 잘 듣고 싶어하지만 첫 실마리를 제대로 포착할 수 없어서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듣는 일이 무척 쉽다고 말하지만 듣지 못하는 사람은 너무도 힘들고 어렵게 느껴지고 더러는 자신에게 주님이 말씀하시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예언자에게 들려지는 것과 일반적인 성도들에게 들려지는 것이 다소 다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주로 예언적으로(계시적으로) 듣습니다. 그러나 평범한 주의 백성들은 인도하심과 가르침으로 듣습니다.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들려지는 내용이 다르고 그 기능도 다릅니다. 예언적 말씀은 타인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구체적이고 세밀하며, 많은 상징을 동원하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그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다양한 기술을 익혀야 합니다.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리고 단시일에 되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성도들이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되는 까닭은 ‘인도하심’ ‘위로하심’ ‘세우심’ ‘경고하심’ ‘책망하심’ ‘가르치심’ ‘생각나게 하심’ 등을 위해서이며, 개인의 영을 함양하기 위해서입니다. 각 사람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있고 그것을 삶 속에서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개인의 영적 성향과 성숙도에 따라서 다르게 시작합니다. 영적 성향은 크게는 이성적인 사람과 감성적인 사람이 있는데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이 됩니다. 이성적인 사람은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그 음성을 듣게 되지만 감성적인 사람은 주로 느낌으로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성령은 모성성이 강하기 때문에 주로 감성을 이용합니다.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해도 감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감성이 발달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해도 성령의 음성을 잘 듣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자신의 감성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성적인 사람들(남성)입니다. 이들은 성령께서 음성을 들려주지 않기 때문에 못 듣는다고 생각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성들이 음성을 잘 듣고 남성들은 잘 듣지 못합니다. 이성적이어서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되지요. 그러나 이렇게 인식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한계가 있습니다. 즉 예언자가 되거나 예언적인 가르침을 받을 수 없습니다. 목회자들 대부분은 주로 이성적으로 음성을 듣는데 이런 분들은 구체적이고 상황적인 음성 즉 예언적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지식의 말씀을 피상적으로 다루게 됩니다. 즉 문제의 본질에 접근해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데는 부족한 것입니다.
성령의 음성은 감성적으로 느끼려고 해야 합니다. 이 작용은 계시적인 음성을 듣는 주요한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 사도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선지자들이 다 그렇게 들었습니다. 꿈과 환상이 주된 계시의 수단임을 우리는 이미 잘 압니다. 이 기능은 어려운 상징을 지니고 있고 그것을 어떻게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지는 우리가 배워야 할 몫입니다. 우리는 하루에 여러 편의 꿈을 꾸고 그것이 음성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수시로 떠오르는 생각이 주의 음성을 담는 수단입니다. 우선 자신의 생각 속에 스며드는 느낌으로 오는 생각을 정리하십시오. 그 생각이 앞에서 열거한 ‘인도’ ‘경고’ ‘책망’ ‘가르침’ ‘위로’ ‘함양’ ‘권면’ 등과 같은 내용을 포함합니다. 특히 처음 음성은 주로 우리를 정결하게 하는 내용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주로 가책으로 옵니다. 행동을 결정할 때 마음에 꺼려지고 하고 싶지 않은 부담으로 옵니다. 이 경우 우리는 그 부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해야 하고 그 생각들이 말씀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이 떠오르고 그것을 기준으로 판단하게 되며 따라서 말씀에 의지하여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뉴스를 볼 때 그에 따른 판단이 서게 되지요. 그 판단이 자의적인 것인지 아닌지를 가늠하기 위해서 말씀을 구합니다. 그러면 짧은 성경지식이라고 해도 어떤 말씀이 떠오르게 되고 말씀이 아니라고 해도 생각이 들어옵니다. 그것을 기준으로 판단하게 되면 행동이 만들어지게 되지요. 행동하지 않아도 될 일이라면 그것이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지식이 모이면 자신의 정체성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생활 속에서 수시로 마주치는 상황들을 경험하면서 생각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 때마다 성령의 감동을 받게 되는데 생각이 주님의 다림줄로 기준이 잡혀야 합니다. 영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성령의 음성에 촉각을 맞추려고 하면 주님은 자신의 영을 정결하게 하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이미 설명한 내용이지만 우리의 영이 얼마나 순수하고 정결한가에 따라서 음성듣기가 정확해집니다.
성령의 음성의 주된 목적은 우리를 가르치시는 교훈적인 내용을 담습니다. 어떤 행동을 할 때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어떻게 가르치고 계시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생각이 무어라고 말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우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는 모호한 느낌이 듭니다. 애써서 그 반응을 살피면 때로는 책망 때로는 칭찬 때로는 무덤덤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이럴 경우 그것이 우리 생각이려니 내 느낌이려니 하고 가볍게 무시합니다.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행한 행동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지내 왔습니다. 반성(반추)없이 삶을 산 것이지요. 그래서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그날 있었던 일들을 곰곰이 되 세기면서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그 일에 대한 어떤 느낌이 분명히 일어납니다. 그 느낌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분별이 잘 되지 않지요. 그러나 책망과 권고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 생각이 어떤 내용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책망이라면 어떤 부분에서 애석한 마음이 들 것입니다. ‘아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하는 생각이 들지요. 그리고 ‘왜 그 생각이 그때 나지 않았지?’하는 후회도 될 것입니다. 그렇게 들어온 생각을 이렇게 성령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예야, 나는 네가 그때 이렇게 행동했더라면 좋았을 거야! 다음부터는 행동을 한 단계 신중하게 하려므나. 그러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겠니?” 이렇게 말을 만들어서 느끼십시오. 이렇게 의식하는 훈련이 되면 그 다음부터는 생각이 말을 만들어서 전해오게 됩니다.
자신의 내면에 스며드는 느낌으로 오는 생각을 대화로 풀어내는 기술이 필요한 것입니다. 단순한 느낌을 느낌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대화로 만들어서 받게 되면 더욱 실감이 나게 되며, 그렇게 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언제부턴가 그렇게 대화로 들려지기 시작합니다. 참으로 신기할 정도로 이야기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소꿉장난을 하면서 혼자 어른과 아이 흉내를 내면서 독백으로 즐거운 놀이를 하듯이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성령과 그렇게 독백으로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이들의 독백과는 다릅니다. 실존하시는 성령께서 우리 생각 속에 그 분의 음성을 흘려보내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 느낌을 맛깔 나게 대화로 구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숙달되면 아주 자연스런 대화형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급하게 처음부터 계시적이고 예언적이며, 지시적인 음성을 들으려고 합니다. 예언적이란 들려진 음성대로 현실에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들려진 음성의 내용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본다면 그 음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확신하게 되며, 자신에게 주님이 음성을 들려주시고 계신다고 믿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확인하고 싶어서 그런 음성을 듣기를 원하며 그런 음성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못 듣거나 아니면 주님이 자신에게는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청난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아주 예외적으로 그렇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음성을 들었다면 그것은 예외에 속합니다. 예외란 한두 번에 그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계속 그런 음성만을 기대한다면 영원히 음성을 듣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아주 모호합니다. 그래서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 시작점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을 때 얼마나 모호했습니까? 보이지 않는 주님을 설명하는 전도자의 전도를 들을 때 어처구니없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 모호한 복음을 우리는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성령의 음성도 그렇게 느껴집니다. 내 생각이라고 우기면 내 생각일 뿐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성령의 음성이라고 생각하고 접근하면 그 생각들이 가치 있게 여겨지고 마음에 새겨집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성숙되면 우리가 원하는 예언적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 때가 이르면 참으로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놀라워해야 하는 것은 수시로 우리 생각 속에 성령께서 친히 말씀을 끼워 넣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전혀 다른 삶을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처음 하는 일은 서툴기 마련입니다. 확신을 얻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시행착오를 겪게 되며, 의심이 들게 됩니다. 그래서 확신 안에 거하기가 그리 간단하지만 않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음성을 따르려는 노력을 하고 배우면 머지않아 구체적으로 그리고 세밀하게 듣게 됩니다. 주의 음성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더 잘 들려집니다. 이 경우에는 예언적인 음성을 듣게 되지요. 다시 말해서 자신의 부르심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 삶을 살아갈 때 더욱 구체적이고 분명한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주님은 일하는 자에게 더 세밀한 정보를 주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친밀함으로 느끼는 그런 음성을 듣게 되지요. 상투적이고 포괄적인 그런 내용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인 것 같은 그런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음성을 듣는 것에 별로 유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날마다 ‘사랑한다’ ‘너와 함께 한다’ 이런 내용만 느껴진다면 곧 식상할 것입니다. 그리고 좀더 드라마틱한 음성을 듣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제대로 알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방언을 말하는데 별로 유익이 없는 것 같고 알아듣지도 못해서 답답하기도 합니다. 지루하게 반복하는 것 같고 그래서 어떤 이는 방언 말하는 것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신기했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면 그저 그렇습니다. 더 이상 신기할 것도 없고 감격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그 방언이 얼마나 유익한 것인지를 알게 되는 날이 언젠가는 오게 되는데 그러려면 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많은 세월의 기도를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음성이 예언적으로 계시적으로 들려지기까지 많은 세월이 필요합니다. 조급해 하지 말고 차근차근 나아갑시다. 생각 속에 스며드는 음성을 찾아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대화로 발전시키십시오. 그것이 첫 단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