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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배회복의 과제들 ㅡ 찬양2024-07-25 15:46
작성자 Level 10

예배회복의 과제 ㅡ 찬양

 

어떤 사람이 예배 가운데 일어나 큰 소리로 성령에 감동이 되어 이렇게 선창합니다. “구원은 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의 것입니다.” 그러자 회중들이 함께 큰 소리로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영원무궁 하도록 있습니다. 아멘!”이라고 외치면서 화답합니다. 이 모습은 요한 사도가 밧모섬에서 환상 가운데 본 천상에서 천사들이 보좌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는 모습입니다. 이 환상은 환상으로 끝나지 않았고 실제로 초대교회에서 성령에 감동된 회중이 열광적으로 찬양하는 모습에서 실현된 것입니다. 성령에 감동되어 주체할 수 없는 열정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뛰면서 뒹굴면서 노래했고 회중은 열광적인 분위기에 고조되어 정신없이 함께 어우러져 노래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모습을 상상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소개한 홍준표 목사의 집회에서 뒹굴고 뛰고 흔드는 열광적인 분위기를 여러분은 이미 보았을 것입니다. 케나다의 공항교회에서 ‘거룩한 웃음’이라고 설명하는 웃는 행동은 우리에게는 처음에는 낯선 것이었지만 초대 교회에서는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이미 ‘초기 기독교의 찬송시’라는 제목으로 소개했으며, ‘새 노래 트힐라를 부릅시다.’에서도 다룬 내용이지만 성령에 감동되어 회중 가운데 누군가가 서서 찬송시를 노래하는 모습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매우 낯설고 이례적인 것이지만 초기 기독교에서는 흔한 일이었음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시교독이라는 고정된 예배의식으로 확정짓기 전에 교회 안에 아주 자연스럽게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찬송시가 흘러나왔습니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요한의 영성에 대해서 교회가 철저하게 담을 쌓았습니다. 이미 앞 글에서 여러 차례 요한의 영성에 대해서 설명한 내용이지만 가슴으로 주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두 가지 큰 산맥이 있었습니다. 수적으로 절대적으로 우세한 야고보의 예루살렘 기독교와 오합지졸과 같은 바울의 헬라 기독교가 그것입니다. 요한의 영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성령의 감동으로 인한 열광적인 예배는 이 헬라 기독교 안에서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이런 모습을 보고 ‘신령한 노래들’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입은 예언과 열광적인 찬양의 모습은 전적으로 묵시적인 성격이며, 이런 모습은 교회 구조를 제대로 갖추고 율법을 존중하는 야고보의 입장에서는 거부감이 드는 것이었음에 분명하며, 후기 교회가 공교회로서 틀을 갖출 때 자연적으로 배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품격이 있는 실내악 연주와 가창력이 있는 성악 연주자가 등장해서 감동적인 고품격의 성악적인 찬양을 합니다. 이는 매우 기교적이고 세련되어 품위를 더하기 때문에 훌륭한 음악연주회를 보는 듯 합니다. 그리고 잘 교육된 찬양 사역자들로 구성된 찬양 리더들이 인도하는 경배와 찬양을 통해서 음악 콘서트를 보는 것과 같은 흥분에 휩싸입니다. 젊은이들은 이런 경배와 찬양을 통해서 감동되며, 그런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서 교회에 몰려옵니다. 이런 분위기는 본훼퍼가 우려했던 어쩌면 ‘값싼 은혜’일수도 있다고 봅니다. 젊은이들을 이렇게 해서라도 교회 안으로 인도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오늘날의 경배와 찬양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날의 모든 집회에서는 찬양은 인도하는 리더들에 의해서 이미 의도적으로 구성한 것이라는 점에서 볼 때 역시 제도적이며, 인본적인 요소가 더 강합니다. 물론 의도적인 것이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의 주체적인 역사를 목격하는 데에는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고린도전서 14:26에 “여러분이 함께 모이는 자리에는 찬송하는 사람도 있고, 가르치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는 사람도 있고,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고, 통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모이는 자리란 예배를 지적하는 것이며, 이런 여러 사람들이 예배의 주체로서 사역하였음을 봅니다. 예배의 구성원 가운데 찬송하는 사람, 가르치는 사람, 예언자, 방언 말하는 사람, 통역하는 사람 등이 있었음을 보면, 이는 다름 아닌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예배를 주도적으로 인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찬송시란 제가 이미 설명한 초대 기독교 찬송시들을 포함해서 신령한 노래로 알려진 ‘트힐라’까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비 콕스가 그의 책 “영성, 음악, 여성”에서 21세기 교회 부흥의 주된 요소 가운데 음악을 들었는데 그 찬양의 형식은 재즈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재즈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흑인 영가’ 즉 ‘black soul’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면 솔 음악이라고 부르는 재즈는 연주자가 어떤 악보를 따라서 연주하는 고정된 음악이 아니라 연주자가 분위기에 휘말려 즉흥적으로 제멋대로 연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의 지시나 간섭이 없이 음악적 흐름에 모든 것을 맡기고 연주하는 즉흥곡입니다. 이런 재즈는 고전 음악에서도 이미 광범위하게 다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환타시’라는 환상곡은 수식어로 ‘즉흥’이라는 단어가 붙습니다. 문예부흥 시기에 살롱에서 연주자들이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즉흥 환상곡’은 실내악의 전형을 이룬 부분입니다.

실내악 연주는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채용하고 있는 연주형태인데 5~6명 많은 경우에는 10여명의 연주자들이 어우러져서 연주를 합니다. 주로 사용되는 악기가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비올라 등의 현악기가 주축이 됩니다. 후에 재즈로 발전하면서 트럼펫이나 플륫 등의 관악기와 타악기인 드럼이 사용됩니다. 연주자들의 감성에 의존하는 즉흥곡은 실내악의 주된 연주곡이었고, 사람들을 즉흥적으로 감동시키며 신선한 충격과 즐거움을 가져 왔습니다. ‘블랙 소올’은 노예로 끌려와서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면서 고통을 잊으려고 목화밭에서 흥얼거리면서 불렀던 즉흥곡들입니다. 이런 즉흥곡에 ‘영가’(靈歌) 또는 ‘환상’(fantasy)라는 단어가 적용되는 것은 이런 노래들이 감정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열광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있고, 예배를 형식으로 고정시킨 공교회 이후 오늘날까지 우리는 모든 것을 예측 가능하고 질서 있게 하기를 원합니다. 열광주의는 무질서하고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배제된 것입니다. ‘즉흥 환상곡’조차도 악보로 정형화해서 연주하고 있습니다. 당시 아무런 제제도 받지 않고 즉흥적으로 연주했던 즉흥 환상곡이 악보로 정리되면서 연주에서 더 이상의 즉흥을 용납하지 않게 되었고 재즈라는 형식으로 하류 음악으로 격하되게 된 것입니다. 재즈는 살롱 음악으로 계속 남았고, 미국 이민자 사회에서 흑인들이 부르던 영가와 맞물리면서 발전해서 오늘날에는 대중음악의 중요한 장르가 되었습니다.

재즈는 즉흥적이며 감동적인 연주 형태를 취합니다. 이런 연주의 특성은 성령의 즉흥성과 잘 어울리며, 기름 부음에 의해서 열광적으로 찬양했던 초기 기독교의 찬송시와 같은 영적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예배에서의 찬양은 초기 찬송시들에서 보듯이 고양된 주님을 높이는 신앙고백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즉 찬송하는 사람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주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이 고백을 듣는 회중은 아멘으로 화답하면서 함께 주님을 높이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 고백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상태에서 주체할 수 없는 감동으로 인해서 눈물을 흘리며 손들고 뛰면서 행하기 때문에 무질서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8순 노모 앞에서 환갑을 넘긴 아들이 어리광을 피우면서 늙으신 어머니를 기쁘게 하시는 모습을 보고 곁에 있던 이웃들이 주책없다고 말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습니다. 어머니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그 보다 더한 것도 할 준비가 되어있는 아들의 이런 모습이 진정한 효이듯이 우리는 주님의 어린 양으로서 주님이 원하는 바를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초기 기독교의 순수한 모습이었습니다.

오늘날 예배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즉흥적으로 찬송시를 읊고 연주자들도 그 흐름에 맞추어 즉흥적으로 연주할 수 있는 것은 재즈입니다. 영적 분위기를 타기 위해서는 찬양 연주자들이 기름 부음에 민감해야 하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들이는 믿음과 영적 민간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찬양자는 주님과 친밀한 교제가 우선되어야 함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기교가 투철하고 높은 학위가 우선되는 오늘날의 찬양 사역자로서는 이런 일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많은 기도와 성령의 감동을 예민하게 읽어낼 수 있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이런 기름부음이 충만한 찬양사역자가 단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찬양하면 그 기름 부음이 회중 전체로 번져갈 것이며 그러면 모두가 성령의 감동으로 인해서 “아멘!”하고 화답할 것입니다.

이런 예배가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적용되기까지는 거쳐야 할 단계가 있다고 봅니다. 우선 성령의 감동으로 트힐라를 부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성도 각 사람이 개인기도를 할 때 찬양으로 기름부음을 이끌어내는 수단으로 트힐라를 불러야 합니다. 신령한 노래를 누구든지 자유롭게 부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방언을 말하는 사람이 소수였지만 지금은 다수가 할 수 있게 되었듯이 신령한 노래 역시 지금은 소수가 부르지만 머지않아서 모든 성도들이 부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저변이 확대되면 교회의 예배에서 이를 적용해야 할 것인데, 우선은 소규모 모임인 구역모임(속회, 순모임 등)에서 적용하기 시작해서 금요 철야예배, 수요 찬양예배 등으로 확대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가대가 모두 신령한 노래를 부르기까지는 회원 전체가 성령 충만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기 때문에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대표로 찬양하는 찬양 사역자가 신령한 노래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솔리스트가 찬양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되었는데 그 역할을 영감 받고 기름부음이 강한 찬양 사역자가 찬송시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이라고 하는 수많은 찬송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편을 우리 시대에 맞는 신앙고백으로 불려질 때에 회중은 감동할 것이며, 여기서 자연스럽게 예언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예언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직접 관여하시는 증거이며, 예배의 모든 구성 요소는 예언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넘치는 예배는 모든 예배 구성 요소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이루어질 때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 부분에서 성령의 감동이 나타날 때 예배 전체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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