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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이야기

제목영적 현상에 대한 지도자들의 미숙한 대응2024-08-10 23:41
작성자 Level 10

영적 현상에 대한 지도자들의 미숙한 대응

 

  교회사는 물론 서방 문명사에서 5세기 무렵은 중세 암흑기의 출발시기입니다. 1000년이 넘는 길고 긴 세월동안 유럽은 종교는 물론 문화에서도 깊은 고립의 시기를 맞게 됩니다. 그 배경에는 로마의 유럽 통합과 기독교의 국교화가 있습니다. 오랜 박해를 거치고 난 기독교가 로마 국교로 공인된 후에 많은 이방 종교들이 아무런 제지도 없이 기독교로 혼입되었고, 그들은 이방신을 섬기는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해 왔습니다. 이방신의 제사장들이 교회의 지도자로 자리바꿈을 하면서 교회는 그 순수성을 심각하게 훼손당하게 됩니다. 교회의 예배가 제사화하기 시작했고, 이방신을 섬기던 제사장의 복식을 그대로 가지고 교회 안에 들어오는 등 갖가지 문제를 들어내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에 꿈과 환상과 같은 영적인 일에서도 역시 많은 문제를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앞의 글에서 제롬과 아퀴나스가 꿈을 교회 안에서 배제시킨 역할을 하였음을 보았습니다. 이 두 사람이 행한 일은 결코 이들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당시 그럴 수밖에 없는 사회적인 배경이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 원인을 찾아본다면 로마 교회가 급격히 성장하면서 기독교의 초기 순수성이 엄청나게 훼손된 데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초기 교회는 다양한 영적 은사들이 넘쳐났습니다. 극심한 박해 속에서 교회가 생존할 수 있었던 배경은 성령의 강력한 증거들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영적 증거들이며, 이것이 모진 박해를 견디게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북한의 지하 교회는 무수한 순교자를 내면서도 굳게 서 있는 까닭은 그들이 목사의 가르침을 받아서도 아니고, 성경을 매일 읽어서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원천적으로 차단된 철저한 고립 속에서 강력한 믿음으로 지탱할 수 있는 비결은 엘리야 시대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 명의 하나님의 백성을 남겨둔 것 같이 거룩한 그루터기를 주님은 강력한 성령의 은혜로 남겨두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3세기 전까지 서방교회는 극심한 박해를 통해서 정말로 순수함을 유지할 수 있었고, 다양한 영적 증거들이 그들에게 끊임없이 나타났습니다. 한편 사회에는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서 영적인 일에 지식인들이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교회는 꿈과 환상에 대한 거부감이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계시의 한 수단으로 이를 널리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5세기가 되면서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안정을 이룬 로마는 기독교를 국교화해서 많은 정치지도자들이 교회의 주요한 위치에 놓이게 되면서 교회는 급격히 타락하기 시작하면서 십자가의 복음 즉 고난의 복음은 사라지고 어떻게 하면 더 풍요로운 삶을 살 것인가에 관심이 많아지게 되었고, 로마의 이민족 지배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교회도 이끌려가게 됩니다.

  더 이상의 박해가 없는 시대를 사는 그들에게 있어서 종교의 관심은 내세보다는 현세에 있었고, 꿈과 환상을 비롯한 모든 영적 은사들은 주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사용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데 현세적 기복의 차원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부와 건강, 행복한 결혼, 출세, 명예, 성공 등과 같은 지극히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얻는데 필요한 도구로 전락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는 장래 일을 점치는 도구로 이용되었고, 장차 되어질 일의 실마리를 찾는 징조와 신호로 이들을 이용하게 됩니다. 이런 행동은 이미 제롬의 시대에도 일반적인 현상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볼 때 불과 30여년 전만해도 가난한 세월을 보내면서 순수한 믿음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70년대를 벗어나면서 교회는 급격히 세속화하기 시작했으며, 기복신앙이 주류를 차지하면서 교회는 현세지향적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불과 반세기도 채 되지 않은 시기에 이렇듯이 급속하게 변화한 모습을 경험한 우리들입니다. 로마 역시 마찬가지로 초대 교회가 꿈과 환상 등과 같은 영적 은사들을 신앙공동체가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영적 삶을 경건하게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갔지만 박해가 끝난 그들에게 신앙의 긴장은 사라지고 날마다 같은 일상이 이어질 뿐이며, 더 나은 삶이란 현세에서 출세하고 더 많은 부를 누려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꿈과 환상은 마치 점치는 것과 같은 역할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꿈과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다림줄로 자신을 다듬는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별로 없는 사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우려 헌신하는 자리에 나가려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관심꺼리였습니다.

 이런 일들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경험하는 바입니다. 영성생활이란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가르침과 권면을 따라서 자신을 다듬어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은사를 그릇된 방향으로 사용했고, 이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은사가 개방되면서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 사람들로 인해서 많은 문제를 나았습니다. 특히 예언의 은사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되어지지 않은 까닭에 예언이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기 보다는 개인의 길흉을 점치는 것과 흡사한 방향으로 나가 문제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꿈과 환상과 같은 영적 기능들도 역시 비슷한 실수를 행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경험한 것과 같이 영적 우월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오용되고 있습니다.

  능력을 받은 사람은 받지 못한 사람들을 얕잡아 보거나 무시하는 태도는 교회의 권위를 어지럽게 하고 있으며, 예언을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에 사용하기 보다는 개인의 유익을 우선하는 태도로 인해서 많은 오해를 만들어냅니다. 오늘날과 같이 지식이 풍성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학문적 배경이 약했던 중세에는 더 많은 문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은사는 여성들에게 주어졌고, 특히 초기에는 학문적 배경이 약한 나이 많은 여성들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지 못해서 많은 실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영성 사역을 거의 20년 가까이 해 오면서 상당한 지적 능력이 없이는 마귀의 올무에 걸릴 위험이 너무도 많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당시의 지성인이었던 제롬은 이런 위험을 보았을 것입니다. 꿈과 환상을 교회에서 무작정 개방하는 일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사실과 그것을 제대로 가르칠만한 영적으로 성숙한 지도자가 없다는 점에서 그는 아마도 꿈 해석을 점치는 일로 정죄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퀴나스 역시 중세의 무지한 신본주의의 병폐를 보았던 사람으로서 그는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화 개혁의 움직임에 따라서 이제까지 중심적인 가르침으로 여겼던 플라톤의 신본주의 사상에서 벗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정신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으며, 이는 근대 과학의 배경이 되는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체계가 무지한 신본주의의 허점을 보완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꿈과 환상과 같은 내면의 작용은 기피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보이는 증거를 따라서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장려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성적 사고는 12세기부터 크게 각광을 받게 되면서 서방 사회는 변화를 시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인문사회의 변화의 흐름에 따라서 아퀴나스는 신령한 은사를 비롯해서 영적 증거들을 얻는 수단으로 개발되어온 모든 것들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꿈과 환상 역시 교회 안에서 철저히 배제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후에 일어나는 중세의 마녀사냥은 영성에 관심을 둘 수 없도록 만들었으며, 공인된 교리 이외에는 모든 것이 차단되는 철저한 고립과 은둔의 시대로 더 깊이 빠져 들어갑니다. 중세 암흑기는 종교적으로나 사회문화적으로 고립주의를 자초했고, 몽골의 유럽공략이 있기까지 이들은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초기 교회 지도자들이 영적인 일에 대해서 미신화하여 철저하게 배격한 이유를 사회적인 안정과 이기적인 신앙생활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영성운동이 개인을 함양하고 더 나은 영적 삶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개인의 종교이면서 또 한 편으로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는 개인을 희생시킬 수 있는 교회 중심의 종교입니다. 즉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여 형제처럼 지내는 공동체 삶을 부인할 수 없으며, 이것을 위해서 꿈과 환상 등을 비롯해서 다양한 은사들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개인의 영적 삶의 함양과 공동체의 유익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어떻게 조화롭게 유지할 것인가를 교회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연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제롬처럼 그런 극단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우리 교회는 제롬과 같은 태도로 일관하는 모습을 봅니다. 영적 지식이 제대로 개발되지 못했던 과거에 많은 사람들이 은사를 바람직하지 못하게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습니다. 그런 까닭에 교회는 이들을 배척했고, 은사를 부정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지식이 부족하면 더 많은 연구를 해야 하고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주님이 주신 것이면 이를 받아들여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용감한 사람들을 통해서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깊은 연구가 진행되었고,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꿈과 환상은 미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도들을 날마다 가르치고 인도하는 중요한 수단임을 이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적용하는데 실수가 있다고 해서 그것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이는 자칫 성령을 훼방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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