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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와 은사

영적전쟁

제목영적 침체2025-08-26 23:03
작성자 Level 10

영적 침체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기름부음이 사라져 사역하는 일이 힘들고 의욕도 생기지 않고 사역에 회의가 들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전하는 말씀에 회중이 은혜를 받아 집회에 기쁨이 넘치던 것이 지금은 그렇지 못하고, 맥없는 집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이제까지 해온 일이 허무하게 느껴지고 의욕이 사라지면서 사역게 깊은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사역을 그만 두어야 겠다는 생각에 시달리기 시작합니다.
영적 침체는 자신의 사역의 원동력인 성령의 기름부음이 사라지면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기름부음(anointing)이 사라지면 사역에 힘이 빠지고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회중에게서는 즉각적인 반응이 나타납니다. 회중이 졸고 하품을 하며, 지루하게 느끼고 기쁨이 사라지고 집중이 되지 않고 산만해집니다.
모이는 사람의 수가 점점 줄어듭니다. 목사님 말씀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 나옵니다.
기름부음이 사라지면 그 자리에 서서히 인본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함니다.

이러한 영적 침체에 빠지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사역자가 주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역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 사역하기 시작하면서 주어진 은사와 능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주님의 영광을 들어내기 보다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능력을 사용하거나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서서히 저버리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아 사역하는 사역자에게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이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태도입니다.
이는 성경에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써 헬라어로 'stigma'라는 말입니다. 이는 거침돌이라고 표현되는 말로써 유대인들이 주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된 요인이 이 스티그마입니다.

우리 전래동화 팔러가는 나귀에서 나오는 것처럼 두 부자가 주변의 사람들을 의식한 나머지 마침내는 나귀를 어깨에 메고 장에 가게 되지 않습니까?
사역자가 부닥치는 문제도 이와 같습니다. 성령의 사역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며, 우리의 고정관념으로써는 전혀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을 행하십니다. 사역자에게 나타나는 역사가 사역자 자신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행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경우 주변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느끼는대로 이런말 저런말을 하게 됩니다. 저도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오해와 도전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렇습니다. 이는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사에서 볼 때 능력있는 사역을 행하는 사람들은 예외없이 이단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이런 비난의 소리를 듣게 되면 자신의 사역에 대해 커다란 갈등을 겪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사역자는 필수적으로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사람들로부터 받는 평가를 두려워하여 그들의 요구에 복종하려는 마음과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려는 생각과 이 두가지를 적당히 혼합하려는 태도입니다.
필연적으로 이 세가지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비판의 소리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정말로 관심을 가지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고, 사역자를 시기하는 마음에 비난하는 사람이 있으며, 무지로 인해서 자기 멋대로 판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역자는 이들의 비판에 대해 충분한 고민을 해야 할 것이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해서 그 현상을 거부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태도이며, 이것이 자신의 기릅부음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을 먼저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성령의 기르부음을 통해서 나타나는 모든 현상은 전능하신 하나님, 인격적이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입니다. 주님의 주권적인 일은 사람의 동의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순종만을 요구할 뿐입니다.

주님의 주권적인 일은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희귀한 것도 아닙니다. 특히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때에 집중적으로 나타납니다. 이 현상은 처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놀라워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경험할 때 누구나 그렇습니다.
지금 자신을 통해서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 사람들의 판단하는 것은 그것이 생소하기 때문입니다. 전혀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지요. 사역을 행하는 자신 조차 처음 보는 현상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주님은 자신을 통해서 이 현상을 세상에 처음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에게 그 현상을 받아들일 충분한 기름부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나타나는 이 현상을 옹호하고 사람들에게 충분히 납득이 되도록 설명하고 이 입장을 옹호해야 할 책임이 자신에게 있는데 이러한 입장을 버리고 사람들의 비위에 맞추기 위해 그 사역을 적당히 얼버무리고 포기한다면 성령의 뜻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결과가 되며. 그 때문에 기름부음이 사라지고 주님으로부터 부적격자로 인정되어 사역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쉬운 예를 들자면 자진이 인도하는 집회에서 사람들이 마구 넘어지거나 엉엉 소리내어 울거나 마구 웃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그런 사람들의 행동이 전혀 절제되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는 경우에 사람들은 사역자가 적당히 통제하고 절제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도자가 절제를 시키지 않고 그대로 둔다면 사람들은 그 인도자가 성숙치 못하다고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소리를 사역자가 듣게 되었고 다음부터 그런 현상이 나타나면 절제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다음 집회에서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면 절제하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면 회중의 반응을 살피고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시점에서 절제를 시킵니다.
이 행동은 매우 세련되고 바람직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여기에는 사역자가 모르는 치명적인 실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집회 중에 성령의 임재로 인해서 절제할 수 없도록 심하게 우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울음소리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방해를 받아 집회가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그 우는 사람을 통제한다면 이는 주님을 무시하는 결과가 됩니다. 그렇게 심하게 울어 집회가 방해된다는 사실을 주님이 모르고 그런 강한 기름부음을 주셨을까요? 그리고 지금 심한 울음소리 때문에
집회가 방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실까요? 아니지요. 모를리가 없습니다. 그러한 은혜를 부어주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지금 그 사람에게는 이런 강한 기름부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사정을 모르지만 주님은 아시고 그에게 강한 기름부음을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자신의 입장에서 방해된다고 해서 절제시키는 것은 주님의 일에 간섭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이 집회를 바로 이 사람을 치유하기 위해서 또는 위로하기 위해서 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한 영혼을 어루만지기 위해서 이 집회를 열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수많은 사람이 간음한 한 여인을 에워싸고 돌로 치려는 현장에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구원하셨습니다. 이 현장에 주님이 오신 까닭은 그 여인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회중은 그곳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러나 그 현장에서 주님은 오직 한 여인에게 관심이 있었고 그 여인을 구원하시는 일만 하셨듯이 지금 이 집회를 오직 이 사람을 위해서 열고 계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날의 집회를 세월이 가면 잊어버리겠지만 그 사람은 그 날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사역자는 이 사실을 회중에게 이해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 중요한 이 집회 그리고 여러분은 이 사람을 함께 축복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초청된 하객들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마치 혼인잔치에 초대된 하객들처럼 오늘 이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내려주시는 은혜의 기름부음에 여러분들이 초대되어 함께 그 즐거움을 맞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람 때문에 우리에게도 은혜를 부어주신 주님을 찬양합시다 라고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일은 사람들에게는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입니다. 그런 걸림돌을 오히려 모퉁이돌로 이해시켜야 할 의무와 책임이 사역자 자신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걸림돌로만 보아 빼어버린다면 주님은 다시는 그를 통해서 이런 일을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역자에게는 영적 침체로 나타납니다.

많은 사역자들이 주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 사역을 시작하였지만 몇년이 못되어 그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경우를 봅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사라진 능력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하지 못하고 변명을 합니다. 그런 사역자들이 주로 하는 변명은 이런 것들입니다.
말씀이 들어오니까 능력은 사라지더라
능력은 말씀 사역자로 세우기 위해서 자신을 이끈 수단이다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이다
능력은 한때 잠시 주시는 것이며, 목회는 말씀으로 해야 한다
능력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말씀으로 구원해야 한다
이런 등등의 말로 자신을 변명합니다. 이 주장을 옹호할 수 있는 성경 말씀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히려 이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성경 말씀은 너무나 많습니다.

영적 침체에 빠진 사역자가 취한 또다른 태도는 적당히 혼합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도 포기하지 않고 사람들의 비난도 받지 않는 수준을 유지하려고 하는 태도를 취합니다.
이러한 태도도 역시 주님에게는 용납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의 비난을 일부는 수용하고 일부는 거부하는 태도는 주님의 능력을 어느 정도 시점까지는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기름부음이 사라지고 맙니다.

수많은 능력 사역자가 부르심을 입어 사역으로 나아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의 기름부음을 끝까지 유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는 걸림돌에 걸려 넘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거슬리면 안될 것같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는 걸림돌을 다루는 배척의 학교를 통과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역을 행하는 당사자 조차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을 행하십니다. 그 일은 자신을 통해서 나타나므로 그 진정성(verity)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압니다. 이 현상이 지금 주님의 기름부음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이단이니 귀신의 일이니 하고 말해도 이에 굴복하지 않고 이를 무지한 회중에게 이해시켜야 할 책임 또한 자신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영적 침체는 이러한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주님의 기름부음이 서서히 사라지는 과정에서 오는 경고의 신호입니다. 계속 기름부음을 거부하고 사람의 눈치를 본다면 주님이 버리겠다는 강력한 경고입니다. 그런데 이 경고를 무시하면 결국은 버려지게 되고 기름부음은 사라집니다. 기름부음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가 사역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 목회자로 목회의 사역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는 아주 부끄러운 일꾼이 되고 만 것입니다. 사울은 이러한 불순종으로 왕위에서 버림을 받았지만 그가 죽는 날까지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눈에는 여전히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사울이 하나님에게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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