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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세상을 요란하게 합시다2025-01-19 22:17
작성자 Level 10

세상을 요란하게 합시다

 

  우리가 주로 많이 듣는 “하나님은 인격이시다”라는 말은 실상 성경에는 없는 말입니다. 

이는 ‘삼위일체’라는 말이 성경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말은 성경이 광범위하게 지지하는 내용이지만 어느 곳에서도 구체적으로 뚜렷하게 적시한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삼위일체’를 설명함에 있어서 매우 혼란스럽고 실질적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이런 까닭입니다. ‘예정론’의 교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교리들은 설명하는 것도 쉽지 않고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격’을 사람의 인격과 동일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형상은 이미 에덴에서 잃어버렸고,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생명을 얻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인격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인격을 빌려온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지요. 그런 까닭에 인간의 인격은 사실 상 하나님의 인격과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주 하나님을 우리의 인격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다’라고 주장할 때 우리가 쉽게 빠질 수 있는 위험은 하나님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서 이해하는 ‘我田引水’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런 교리를 사용할 위험이 많습니다. 교회는 이 주장을 매우 흔히 사용하며, 신앙생활을 웬만큼 한 성도들이면 누구나 이런 주장을 우선합니다. 그러나 실상 ‘하나님은 인격이시다’라는 모호한 교리에 앞서서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은 4:24에서 대표적으로 다룬 내용입니다. 그러나 성경 도처에 이 말씀을 지지하는 유사내용들이 산재해 있습니다(사 11:2 욥32:8 등).

 

사실 인격이라는 말보다 영이라는 말을 더 강조해야 할 의무가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인격은 세상의 학문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고 다듬어질 수도 있습니다. 세상 학문은 윤리학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인격을 가르칩니다. 사회 공동체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에 대해서 철학과 윤리학은 끊임없이 연구하고 있고, 타 종교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 다루고 있지만 영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오로지 교회만이 다룰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접근은 초신자들에게는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교회 공동체 생활을 위해서는 교회라는 특수한 집단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그 속에서 표준이 되는 인격적인 모양새를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사회에서 배운 내용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특별히 ‘기독교 윤리’라는 것이 있지만 사회 윤리학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영이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상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대다수의 성도들은 영의 초보수준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세속적 틀과 가치관으로 가득합니다. 이들에게 영이신 하나님이라는 말보다는 인격이신 하나님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평가할 때 그 기준이 되는 것이 윤리입니다.

그들이 세상적인 윤리의 잣대로 그리스도인을 평가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평가는 의미가 없습니다. 바울은 “세상이 우리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평가한다”고 주장했습니다(고전 6:2 고전 2:12).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평가를 따라 사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을 향해서 영의 판단을 선포하는 존재입니다(시 96:13, 시 119:137, 고전 6:2).
 

하나님의 판단은 언제나 의롭다는 사실을 증거할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그 판단은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영적이란 기록된 말씀을 예언자적인 감각으로 해석하는 것과 새로운 차원의 계시를 통해서 선포하는 선지자적인 감각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계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교회가 인식할 때 윤리관을 뛰어넘어서 영의 증거들을 세상에 향해서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영적 증거들을 강력하게 드러낸 일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1907년의 평양 대부흥의 물결 속에서 이천만 조선인들이 새로운 영적 물결에 놀라 교회 안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이미 영국의 웨일즈 지방에서 일어난 대대적은 회개의 역사의 큰 물결의 여파였습니다. 교회가 사회를 향해서 드러낼 수 있는 절대적인 영향은 거대한 영적 물결입니다.

우리는 근래에 치유와 방언 운동을 통해서 그런 물결을 경험했지만 사회에 대대적인 충격을 던지지는 못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사단이 먼저 그 일을 저질러버렸습니다. 93년의 시한부 종말론의 소동이 그것입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온 나라가 떠들썩하도록 물의를 만들어낸 이 헤프닝은 사단이 대대적인 영의 증거를 방해하려는 사전 공작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때 사건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영의 일이란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허구일 뿐이라는 그릇된 시각을 지니게 만들었습니다.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까지도 영의 증거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을 갖도록 하는 나쁜 영향을 주었고, 그래서 더욱 더 인격적이라는 말에 동의하게 만들었습니다. 교회는 교리적이고 체계적이며 윤리적인 모습으로 굳어져갑니다.


인격적이란 말은 고상하고 질서 있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반면에 영적이란 신비적이고, 무질서하고, 감성적이라고 판단합니다. 합리와 이성을 고상한 가치로 받아들이는 성도들은 ‘거룩한 모양을 취하는 일’에 무척 관심이 많지만 ‘능력을 취하는 일’에는 도리어 관심을 끊어버리는 어리석은 행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서 영적 증거들을 쏟아 부었던 초대 교회의 사도들의 역사는 세상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해서 감화를 줄 뿐만 아니라 충격도 주어야 합니다. 감화라는 측면에서는 인격적이라는 말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충격적이라는 측면에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거룩할 뿐만 아니라 야생마처럼 저돌적으로 돌입하는 담대함도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 속성을 한 사람 안에서 다 충족할 수 없다면 각각 나누어서 행할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어떤 이는 아주 점잖고 고상하게 인격적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낸다면 어떤 이는 공격적이고 충돌적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두 속성 모두가 하나님의 성향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불을 던지기 위해서 오셨지 않습니까? 다툼과 갈등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바울을 고소한 이방인들이 내세운 고소 내용이 바로 ‘세상을 소란하게 했다’는 것입니다(행 16:20, 행 17:6, 행 19:23).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변사 더둘로와 함께 바울을 고소할 때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행 24:5)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에 세상을 요란하게 한 것은 바로 그가 지닌 능력이었습니다(고전 4:20).


세상에 충격을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입니다. 이것은 영을 통해서 오는 것이며, 이는 이사야를 통해서 하신 말씀인 “야훼의 영이 그 위에 내린다. 지혜와 슬기를 주는 영, 경륜과 용기를 주는 영, 야훼를 알게 하고 그를 두려워하게 하는 영이 내린다.”(사 11:2)라는 성경의 증거를 확증하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고 두려워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에게 충격을 주어야 합니다. 경륜만이 아니라 용기도 더불어 주시는 영입니다. 우리는 경륜만을 강조했지 용기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면이 많습니다.

이 충격은 감동과는 다른 것입니다. 인격은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감동을 따라서 구원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충격을 받지 않으면 도무지 나올 수 없는 완고한 사람들이 세상에는 더 많습니다. 적당한 말로 해서 교회로 이끌 수 있는 사람들은 이제 거의 다 들어왔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충격이 아니면 도무지 고개를 떨길 줄 모르는 완악한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이들에게 말보다는 매가 더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경험하지 않으면 절대로 돌아오려고 하지 않는 이런 사람들에게 능력 전도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이신 하나님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가장 큰 단점이 한 쪽으로 과도하게 치우친다는 사실입니다. 너무도 오래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인격적인 쪽으로만 기울어간 태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부흥을 생각하고 그 동안 소홀히 다루었던 영의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세상을 향해서 불을 던지려고 하셨고, 그 불이 붙었으면 좋겠다(눅 12:49)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이제 불의 선지자인 엘리야처럼, 세상을 소란케 했다는 죄목으로 법정에 섰던 바울처럼 그렇게 우리도 한 번 세상을 복음의 능력으로 떠들썩하게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잠잠하고 있는 동안에 불신자들과 타종교가 세상을 요란하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온갖 스포츠 행사와 정치가들의 쇼가 세상을 헛되게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한 번 요란하게 만듭시다.


출처: 성령치유집회 (부산)세계로 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야긴과 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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