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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제 8장 준비하는 마음의 자세2024-12-12 18:47
작성자 Level 10
제8장  준비하는 마음의 자세


오늘 예언의 말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마른 뼈들이 살아나고 있다. 살아나고 있느냐? 살아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질문 식으로 말씀하셨는데, 그러면서 여러분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게 보이지 않으면 마음을 찢고 회개하라고 했다. 이 말은 여러분이 선교회 화요정기집회에 오는 이유는 각자마다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는데, 여러분에게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그것은 다 헛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 섬긴다고 하는 모든 것도 다 헛것이다. 왜! 인본적인 것에 불과하니까.

그러면서 하나의 기준으로써 여러분은 각자가 지금 마른 뼈가 살아나고 있는 것이 보이냐는 것이다. 정말 보이는가?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가? 그 얘기 내용은 여러분 눈에 마른 뼈가 살아나는 것이 보이고, 그들이 왜 살아나는 가가 보이고, 그 길이 무엇이고, 다른 사람에게 뿐만 아니고, 내 삶에 그러한 부분이 보이지 않거든, 하나님 앞에 회개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신앙의 본질로 나로 하여금 돌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살아나게 되어있다.

화요모임에서 시리즈로 설교하는 것이 쉽지 않다. 왜냐면 시리즈로 설교하다 보면 한두 달 길게는 서너 달 정도 지나는데, 4주 정도만 지나도 우리가 너무나 쉽게 본질적인 것을 망각하고 지엽적인 것에 매달리게 된다. 그렇다고 매주 본질적인 것만 반복할 수도 없다. 그러나 잠시만 눈에서 떨어지면 금방 그것이 희미해져 버리고 옆으로 가버리는 이러한 어려움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하나님께서 예언을 통해서 다시 그 본질적인 부분을 드러내 주신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말씀은 “네가 부자가 되기를 원하느냐? 나를 따르기를 원하느냐?” 새물결선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말로는 최소한 부자가 되기 원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럼 예수님이 그것도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닐 것이다. 거듭 겪어보지만 우리가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사역 얘기해봐야 말짱 도루묵이다. 다 헛것이고, 능력 얘기해 봐야 파멸로 이끌 수 있다. 너무나 많은 경우에 오늘날 본질적인 부분을 다루지 않고, 능력을 추구하고, 때로는 능력이 임하니까 자기 사역의 확장을 위해서 가는데, 이것은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이다. 진짜 영적으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우리의 마음 중심에서 내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열망이 아니면 우리의 신앙은 타락한 것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사역이나 능력으로 관점이 돌아간다. 그게 타락이다. 모든 죄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교만도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붓고 계신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만큼 우리에게 기쁨이 있다. 소망도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만 경외하는 마음으로만 가득하면 주님만 사랑하게 될 것이고, 거기서부터 사역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 관계에서 하나님의 움직이심을 보고 우리가 순종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이 사역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초점은 하나님 그분을 알고, 사랑하는 것만이 우리의 단 하나의 삶의 유일한 목적이 되어야 한다.

여러분 가운데서 아직 이러한 부분들이 덜 깨달아질 수 있다. 그런데 이 마음만 가지면 된다. 여러분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 내려놓아야 한다. 여러분은 모른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8:2)그러면서 너희가 안다고 생각하지 말고 바보가 되라고 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 내려놔야 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작은 지식에 집착해서 못 깨닫는다.

여러분이 같은 장소에서 같이 하나님의 음성(예언)을 듣고도 그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전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통회하는 마음이라도 있어야 한다. ‘하나님 제가 알지 못합니다. 제가 영적으로 귀가 어둡습니다. 제가 안다고 하나 보지 못합니다.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본질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이렇게 통회하는 마음이라도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니까 그 말씀 앞에 떠는 자세로 ‘하나님 저에게 하나님의 길을 계시해주세요.’ 이렇게 자기의 안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 도와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세로 하나님을 찾으면 말씀하신다.

이제 우리가 귀신들린 자를 사역 할 때, 우리가 어떤 마음을 준비해야 되겠는가? 그 자세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역함에 있어서 첫 번째는 먼저 우리 자신이 주님의 말씀과 진리로 무장하는 것이 필요하고, 두 번째는 영적으로 진단하는 것이 필요하고, 세 번째는 어두움의 세력들의 반격이나 공격에 대해서 대비하는 것들, 이러한 것들이 사역을 하기 전에 준비해야 할 자세들이다.

1. 믿음으로 준비하는 것.

사역 할 때 우리 마음을 믿음으로 준비해야 된다. 준비 없이 하면 실패하기가 쉽다. 예를 들면 목사님들이 설교준비 없이 나가면 설교하기 쉽지 않다. 어떤 분은 하나님이 그때그때 주신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준비가 전혀 없이 나가는 분들도 있는데, 내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인도 가운데, 기도 가운데 준비는 철저히 해야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부분이 약간 다를 때가 있지만 준비되어야 된다. 메시지 내용도 준비되어야 하지만 영적으로 준비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하물며 사역할 때도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준비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갖는 identity,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신분을 깨닫고 그 확신위에 서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면 그래야 우리가 믿음으로 사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뜻은 항상 최선이다.’ ‘하나님은 전지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지시는 항상 옳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당신이 그분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하신다.’ 우리는 과거에 이 구절을 여러번 들었다. 그리고 매우 은혜스러운 말씀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그 사실을 믿습니까? 라고 말하면, 안믿는다고 말하는 분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하는 것은 이론이다. 이 이론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소개하는 소개에 불과하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습니까?’ 그러면 다 ‘믿습니다.’ 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그게 믿음은 아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2:19) 그런 믿음은 귀신들도 가지고 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도 제자들보다 귀신들이 예수님이 누군가를 더 잘 알고 더 먼저 알았다.(막1:23-24) 우리가 머리로 그 사실을 동의한다고 해서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은 성령님만이 하실 수 있다.

믿음은 성령의 조명으로 비춰져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성령의 조명으로 발견하고(깨닫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다. 그러니까 모든 면에서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믿음은 없게 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만큼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을 아는 만큼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자는 그것이 행동으로 나오게 되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아 - 오늘도 내가 행해야 되는데 오늘도 못했구나 하면서 죄책감을 갖는데, 그 얘기가 아니다. 믿음의 종류가 잘못됐다는 것을 말한다. 이론적으로 아는 믿음은 절대로 행함이 안나오게 되어있다. 왜!, 실제를 모르니까.

다시 돌아가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뜻은 항상 최선이다.’ ‘하나님은 전지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지시는 항상 옳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당신이 그분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하신다.’ 이것을 수없이 설교할 수도 있고, 우리가 이 사실을 알 수도 있다. 그런데 내 얘기는 하나님께서 이것을 깨닫게 해주셔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되 독생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실 만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항상 최선이라는 사실을 내가 깨닫지 못하면 보통 때는 잘 믿는 것 같은데, 작은 어려움만 닥쳐도 금방까지 믿었다고 하는 그 믿음이 다 사라지고 그 자취도 안 남는다. 아니, 하나님의 뜻이 최선이라고 했는데 왜 이거밖에 안돼! 그러면서 불평한다. 그러나 성령님이 도와주셔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최선이다 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나는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열망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 있어서 내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 할지라도 최선인 것을 신뢰할 수 있게 된다. 그러기에 그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그 속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갖게 되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다. 왜냐면 하나님은 영이라 안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 것은 하나님은 살아계신 인격체이시고, 성경말씀은 한편으로 그 그림자와 같다. 그래서 하나님은 안보이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몸을 보지 못하면 그 그림자라도 잘 봐야 그 형체를 알 수 있듯이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서 말씀해주시는 성경을 잘 연구해야 한다. 안그러면 신비주의에 빠지기 쉽고, 미혹되기 쉽고, 자기중심적인 주관적 신앙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고치기가 참 힘들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가 체험한 것 외에는 안 받아 들인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항상 최선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제는 그 말씀을 붙들고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주시도록 기다려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묵상이 중요하고,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시간이 중요하고, 그 시간을 통해서 그 실체를 깨닫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구해야 된다.

왜 이 얘기를 복잡하게 하냐면, 우리에게 주신 권세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예수 권세 내 권세’라고 여러분이 아무리 외치고, 그 찬송을 목이 터져라 크게 불러도 막상 귀신 앞에 서면 두려워한다. 왜냐면, ‘예수 권세 내 권세’는 말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준비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여러분 각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해서 예수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주신 권세가 어떠한 것인가를 성령님이 비춰주심으로 깨닫고 그 토대위에 서서 나가는 믿음이 필요하다. 왜냐면 이 믿음이 무기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이 믿음위에 서면 큰소리 안질러도 귀신은 안다. 그런데 이 믿음위에 안서면 아무리 악을 써도 귀신은 다 안다.

치유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제 병을 고쳐주세요. 고쳐주세요. 고쳐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면서 쉬지 않고 철야하고 금식하면서 기도한다. 매우 절박하게 기도한다. 그런데 그것은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절박함과 믿음은 전혀 다르다.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 분은 하나님이 고쳐주시기 원해도 받을만한 준비가 안돼 있다. 왜냐면 온갖 생각과 관심이 온통 자기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해서 전혀 문이 안 열려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치유의 은혜를 주시려고 해도 하나님을 쳐다보지도 않고 있다.

이런 얘기하면 여러분들이 웃겠지만, 어떤 사람은 문제만 있으면 ‘하나님 어떡합니까?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하나님 빨리 어떻게 해결 좀 해주세요.’ 그러면서 이 사람에게 가서 기도 받고, 저 사람에게 가서 기도 받고 한다. 그래서 매우 절박하고 하나님 앞에서 갈급한 것 같고, 잘하는 것 같지만 아니다. 전혀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맨 날 그 얘기하고, 거기에만 집착해 있다. 하나님께서 만져주실 틈이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치유를 위해서 예수님께 나온 자들을 한번도 거절하신 적이 없다. 심지어 수로보니게 여인이 와서 자기 딸을 치료해 달라고 할 때,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마15:26)고 하셨다. 치유를 자녀의 떡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자기 자녀에게 주시는 밥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자기 자녀에게 주시는 밥이 치유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다. 그래서 성경 말씀에 의하면 치유는 하나님이 자녀된 여러분에게 주시는 밥이다. 밥은 가장 기본적인 식사를 말한다. 성경은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9-11) 여기 좋은 것은 치유도 포함된다. 우리말에 좋은 것을 영어로는 good이라고 나와 있고, 헬라어로는 ajgaq;ovς,라고 되어있다. 똑같은 단어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이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실제를 깨닫게 해달라고 말씀 앞에 서서 주님을 더 알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이 조명해 주셔서 나를 치유하실 주님을 발견하고 내 병의 치유를 위해 그분을 신뢰할 때, 치유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간절함과 절박함은 다르다. 너무나 많은 경우에 절박함은 불신 때문에 그렇다. 치유 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불신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마음이 차단되어서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매우 절박하기는 한데 눈이 하나님께 안가 있다. 하나님을 발견하고 믿음으로 그분을 신뢰하게 될 때, 그분이 지금 은혜를 주시려고 예비하고 있는데, 주님을 향해 문을 열지 않고 불신으로 문을 차단시켜 버림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것도 율법주의가 아니냐. 왜 꼭 문을 열어야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다고 그러느냐. 그러는데, 그런 사람들은 말을 왜곡시키는 데는 아주 도사들이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는 여러분에게 값없이 주신다. 그런데 그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도록 문이 열려져야 들어올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은혜는 쏟아 부어지려고 하는데, 여러분의 문을 꽉 닫고 여러분의 눈은 항상 환경만 바라보고 있으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갈 틈이 없다. 믿음은 뭐냐? 간단하다. 믿음은 벌어들이는 것이 아니고, 믿음은 성령님의 조명으로 그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을 향하여 나의 마음을 여는 것이다. 그 은혜를 향하여 내 마음을 열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은혜가 들어올 수 있도록 여는 것이다. 그 여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다. 그리고 문을 연다는 것은 환경에서 눈을 들어 주님을 보는 것이다.

환경도 마찬가지다. 어떤 때는 자기 환경에만 집착해서 아- 기도도 안되고, 그래서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절박하게 기도하고, 혹시 40일 금식기도 해야 되나, 작정기도 해야 되나 하면서 막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그런다. 그러면서 여기 가서 기도 받고, 저기 가서도 기도 받고, 도와달라고 이 사람에게 얘기하고, 저 사람에게 얘기하면서 정작 하나님은 안본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의외로 많다. 나는 아니라고 하지말라. 그런데 그것은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안그런다. 그럴 때는 성경이 해답이다.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 말씀을 붙잡아야 한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10:30)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6:28-32)

극단으로 치우치지 마라.
우리는 참 극단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사람은 앞에서 말한대로 어려운 일만 있으면 하나님,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그러는가 하면, 또 한 부류는 그냥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뭐, 그리고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 특별히 무책임한 남편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다. 지금 집에 먹을 양식이 떨어졌는데 신경도 안쓰고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겠지 뭐, 그러고만 있다. 이건 무책임이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내 마음의 상태도 아니고, 이론적인 지식도 아니고, 믿음은 성령의 조명으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이다. 이것은 귀신을 쫓아내건, 치유를 위해서건, 필요를 위해서건 다 마찬가지다. 여러분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믿음은 아무것도 안하는 것 같지만 그 무엇보다 적극적이라는 것이다. 믿음은 자신의 모든 삶을 거는 것이다.

믿음은 적극적인 것이다.
설교 방향이 좀 그런데 이 부분을 살펴보아야 권세도 알기 때문이다. 믿음이 얼마나 적극적인가를 한 가지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다. 그런데 배를 지으려면 바닷가에서 지어야 고기를 잡든지 뭘 하든지 하는데, 하나님은 배를 높은 산에다 배를 지으라고 하신 것 같다. 그것도 작은 배가 아니고 축구경기장 만하게, 그 당시 무슨 전기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목재를 나르고 올릴 중장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전부다 수공으로 해야 되는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안되면 노아는 자기 인생 망치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자기의 모든 젊음을 다 투자했는데 그게 도루묵이고 꽝이 된다면 어떻겠는가, 인생이 두 번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으로 인생이 끝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순종하려면 믿음밖에 없다. 그러므로 믿음은 소극적이거나 자포자기와는 전혀 다르다. 믿음은 눈에 안보여서 그렇지 매우 적극적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나 극단에 치우쳐서 한쪽에서는 절박하게 부르짖는 반면에 또 한쪽에서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뭐,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산다. 그것은 전혀 믿음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말씀 앞에 가야한다. 말씀 앞에 가서 ‘하나님, 저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주세요. 저의 머리카락까지 세신 그 하나님의 섬세하심을 저에게 알게 해주세요. 하나님, 환경에 치우치는 것은 믿음이 없는 자라고, 불신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불신은 하나님 앞에 죄악인데,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전혀 신뢰하지 못하는 죄가 내 속에 있음을 봅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어요. 저를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을 알게 해주세요.’ 이렇게 그 말씀 앞에 그 실제이신 하나님을 성령님께서 조명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러는 가운데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 나를 부르신 하나님,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나를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 나의 세밀한 것까지 아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발견하고, 내 환경이 어떠하든지 능히 하실 수 있는 그 능력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리고 이 신뢰는 매우 적극적인 것이다. 자신의 삶을 거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님의 조명이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성령님의 조명이 있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마음의 자세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8:2) 그리고 사도바울은 너희가 지혜롭고자 하느냐? ‘바보가 되라’고 했다.

둘째는 회복되기 위해서 우리 가운데 회개할 죄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환경에 집착해서 어떻게 보면 안쓰럽기까지 하는데, 그런 사람은 기도해줘도 효과도 없다. 왜냐면 자기 문제에만 집착해 있고, 하나님은 전혀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기도 받는데 왜 빨리 안 낫느냐고 불평한다. 하나님은 나를 당연히 치유해 주어야 되는데 왜 빨리 안 해주냐는 얘기다. 너무나 불신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빨리 환경에서 눈을 들어서 주님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주님이 조명하신다. 조명하시되 불신부터 조명하신다. 그래서 불신을 회개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세가 잘못되었음을 보여주시고, 본질적인 면에서 틀어졌던 것들을 회개하게 하신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죄를 돌이키고, 주님을 알기를 구하고, 주님의 뜻을 더 깨닫기를 원하고, 주님께 삶이 조정되어져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권세도 마찬가지다.
권세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깨닫고 그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이론적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성경을 읽고, 설교를 여러 번 들어서 그 내용을 알아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권세를 깨닫는 것은 성령님만이 하실 수 있다. 성경의 어디에 그렇게 말했느냐고, 근거를 대라고 한다면, 예를 들면 이런 것과 똑같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24:45)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눅24:44) 제자들이 그전에 한두 번 배운 것도 아니고, 여러 번 듣고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깨달음을 주셨을 때, 제자들이 그 말의 참다운 실제를 깨닫게 되었다.

또 있다. 에베소 1장에서 사도바울이 성도들을 향하여 기도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7-19)

이처럼 성령님의 비추심이 있어야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성령의 비추심이 있어야만 이 사역도 주님과 교제 가운데 되어질 수 있다. 어떤 분들은 은사가 강하게 나타나서 그 기름부음 때문에 강한 치유들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의 말로는 대부분 안 좋다. 그리고 소위 귀신 쫓아내는 축사 사역한다고 하는 분들의 말로를 보면 대부분이 안 좋다. 왜냐면, 그들은 사역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님과의 교제 가운데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0-23)

불법을 행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기준대로 행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처럼 주님과 올바른 관계 가운데 사역이 되어지지 않으면 그 사역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오히려 파멸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잘 볼 수 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경우에 영성사역 한다고 하는 분들의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빼놓고, 능력만을 구한다. 아예 안 다루는 경우가 많다. 왜냐면 이 부분을 건드리면 껄끄러워지니까. 삶이 조정되어야 하니까. 자기의 영역이 아니라 주님의 영역아래 자기 영역이 굴복되어야 하니까. 자기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자기의 삶을 지배해야 되니까. 자기가 원하는 사역의 목표와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대로 그것이 내려져야 하니까. 안건드리고 한쪽만 강조한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그것이 패망으로 이르는 길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가장 첫 번째 특징이 삶에 변화가 없다. 영성 사역하는데 몇 년을 다녀도 변화가 없다.

여러분이 주님과의 교제 가운데 있으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의 그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 말이 시금석이 된다. 그런데 주님과의 교제가 전혀 없이 여러분들이 어떤 능력과 은사만을 구하면 옆으로 가기 쉽고 미혹되기 쉽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그것이 없으면 회개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
이와 같이 믿음은 말씀에 기초해서 그 실제이신 하나님을 성령의 조명으로 발견하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에게 자신을 계시하신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 설교하는 나도 내가 믿음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을 때는 ‘하나님, 저는 하나님 한분으로 충분합니다.’ 그러한 고백이 속에서 나올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런다. 하나님만 계시면 다 된다.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 초점이 조금만 옆으로 가면 하나님 한분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것 같다. 하나님이 계셔도 뭐가 있어야 될 것 같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옆으로 벗어난 것이다. 우리 마음이 타락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이 ‘주님 저는 주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라고 확신이 넘치면서 저는 주님만 알기 원합니다. 저는 주님만 사랑하기 원합니다. 그것만이 저의 유일한 목표입니다.’ 이렇게 정직하게 대면해서 흔들리지 않고 확신할 수 없으면 여러분은 지금 옆으로 가있는 것이다. 이 고백이 안될수록 옆으로 가있고, 이 고백이 되어질 때, 하나님이 가장 많이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게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다. 그리고 그 상태에 있을 때에 하나님을 많이 계시하시기 때문에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부어지고, 그 상태에 있을 때에 내 삶을 다 드려 주님을 위해 살기를 원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 나는 하나님 한분이면 충분합니다.’ 여러분 속에 이 마음이 있는지 지금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그러한 마음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

오늘 설교가 계획대로 하든지 못하든지 상관없이 이 설교가 여러분에게 매우 중요한 말씀이라는 것을 우선 확신한다. 왜냐면, 오늘 예언을 통해서도 그렇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지금 이 부분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을 말씀하고 계시고, 나도 오래전부터 느껴왔던 바이기 때문에 꼭 필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여러분들은 특별히 목회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기 바란다. 선교회에 나오시는 분들은 그나마 이런 것들을 깨닫고 돌이키려고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가 얼마나 철저하게 율법주의, 인본주의적인 사고로 옆으로 가있는 것을 보게 된다. 지금 선교회에 많은 목사님들이 오시는데,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 저는 하나님 한분이면 충분합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만 알고 사랑하는 것을 제 삶에 유일한 목표로 삼기 원합니다.’ 이 고백을 원하신다. 이것은 목회자들만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신앙의 본질이다. 신앙의 기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호세아 6장 6절을 인용하시면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마12:7)고 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성경박사들이다. 그들은 모세오경뿐만 아니고, 구약성경 전체 내용을 다 믿은 자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저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믿지 않는다고 했다.(요5장) 한마디로 성경 박사라고 하는 그들이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도 못 깨닫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적소경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1) 주님께서 소경의 눈을 고쳐주시면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하실 분으로 오신 것을 표적으로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주님은 그들이 표적을 보고 주님께 나오기를 기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보는 자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영적 분별력이 중요하다. 이것은 목회자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가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자세다. 그것이 우리에게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별개 있어도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너무너무 안타까운 사실은, 우리는 매우 그럴듯한 설교를 많이 하고, 매우 많은 하나님 말씀을 인용하고, 많은 것들을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하지만, 너무나 많은 경우에 내 속에 가장 기본적인 그 마음이 없다. 그만큼 심각하다.

우리 모두가 그 마음을 가졌다가도 잠시만 한눈을 팔면 우리는 이내 사역이 앞서서 말로는 하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뭔가 있어야 될 것처럼 옆으로 가기 시작하는데, 하물며 어떻겠는가? 그러면서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큰 건물을 자랑하고, 예산을 자랑하고, 은사를 자랑하지만 너무나 많은 경우에 하나님이 하신 일보다는 우리가 한 일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우리의 치적을 자랑하고 있다. 이것은 목회자 뿐만 아니라 성도들도 대부분 그렇다. 나는 아니라고 부인한다면 그것은 매가 뜨니까 꿩이 머리만 처박는 것과 같이 현실을 무시한 채 자기 눈을 손바닥으로 가리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열어놓고 본다면, 통회할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가장 기본적인 고백은 ‘하나님, 저는 하나님 한 분이면 족합니다.’ 이다. 이게 값진 진주를 보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단 하나의 유일한 열망과 목표가 되는, 많은 것 중에 첫 번째도 아니다. 이 고백이 없으면, 이 삶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이게 없으면 빨리 사역을 중단하고, 주님을 찾아야 한다. 주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심각한 시대에 살고 있는지, 우리들이 구하는 것을 보라.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신의 문제 때문에 고민하는가?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이 문제이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여러분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여러분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더 이상 문제가 문제되지 않는다. 여러분이 고민하는 문제가 무엇인가? 문제 때문에 고민하는가? 아니면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고민하는가? 성경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10)고 말한다.

주님이 여러분의 모든 것이 되지 않으면, 심지어 세상에서 엄청난 사역이 여러분에게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때로는 그것이 없어도 역사하신다. 그러나 여러분이 주님 앞에 받을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왜냐면 그 어느 것 하나 여러분이 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통해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도 한다. 심지어 하나님은 기룟유다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 관계로 돌아가야 된다. 수시로 돌아가야 된다. 그리고 그 관계가 되어 있으면 되어진다. 거기서 권세가 나오고, 거기서 믿음이 나오고, 거기서 친밀함이 나오고, 거기서 능력도 나오고, 거기서 순종도 나오고, 거기서 치유도 나오고,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

끝으로 지금 이 내용을 잘 숙지하고, 깨달아서 잘 활용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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